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인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또한 분단국가였던 시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서독과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동독이 분리되었으며 이는 9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베를린 장벽이 마치 우리나라의 38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이런 아픔을 이야기해 왔다. 그의 작품 피닉스, 트랜짓에서도 2차 대전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고 지금 리뷰하는 바바라 또한 그 당시의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영화는 동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시골 병원으로 좌천됐지만 전혀 다른 성격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바바라와 안드레가 있다.
바바라에게 동독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로 보인다. 주위 동료들의 호의도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하루빨리 사랑하는 사람과 서독으로 떠나는 것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 버티며 살아간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가해지는 검열 또한 바바라가 동독에 염증을 느끼게 하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반면 안드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바바라와 마찬가지로 동독에서의 상황은 안드레 또한 버티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바꾸며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쌀쌀맞다고 생각했던 바바라가 소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안드레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영화는 마치 콘크리트벽에서 자라는 꽃을 연상시켰다.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바바라가 소녀에게 내민 손과 안드레가 바바라에게 보인 관심이 주위에 희망이라는 씨앗을 싹트게 하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그림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 그림의 손을 보면 잘못 그린 것처럼 보이고 마치 다른 쪽 손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드레는 바바라에게 이 손은 해부학 책의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그린듯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이는 마치 체제라는 거대한 껍질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이 그림 후 경찰이 아픈 아내를 데리고 있었다는 장면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 한 체제하의 사람들이지만 각자 저마다의 사정과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나약한 사람일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에 따라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래서 동독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바바라? 라며 찝찝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체제라는 껍질을 뛰어넘어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바바라의 성장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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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링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