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 꿈이었는데... 촬영 필름이 몽땅 사라졌다
넷플릭스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입력2021.09.18 10:00
편집자주
※ 차고 넘치는 OTT 콘텐츠 무엇을 봐야 할까요. 무얼 볼까 고르다가 시간만 허비한다는 '넷플릭스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긴 시대입니다.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전문기자가 당신이 주말에 함께 보낼 수 있는 OTT 콘텐츠를 넷플릭스와 왓챠로 나눠 1편씩 매주 토요일 오전 소개합니다.
당신은 영화감독이 꿈이다. 친구들과 고교 졸업을 앞두고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촬영했다. 필름 현상 후 편집을 거쳐 영화를 완성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당신과 친구들 모두 해외 대학에 진학했다. 어쩔 수 없이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와 영화를 완성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학기를 마친 후 집에 와 보니 필름이 온데 간데 없다면 당신은 어떤 심정일까.
넷플릭스에서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바로 보기
①꿈이라서 더 깊었던 상처
싱가포르 감독 탄은 1992년 19세 때 16㎜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돈을 모으고 장비를 구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 탄 일행은 자신들의 작업이 싱가포르 영화 역사를 장식할 것이라 믿었다. 영화 이름은 ‘셔커스’.
조지스라는 미국인 교사가 멘터 역할을 해줬다. 출국 전 가까스로 영화 촬영을 마치고 탄과 친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고교 졸업을 하며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은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영국 유학 길에 올랐다. 학교 공부에 쫓기고 새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영화를 완성할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고향에 돌아온 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필름을 맡겨 둔 조지스가 사라졌다. 필름이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매번 눈높이를 낮춰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조지스의 행방불명은 탄 등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탄 등은 가슴이 아팠다. 탄은 감독의 꿈까지 접을 정도로 상처가 컸다. 영화라는 꿈이 아픔을 준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으니 내상이 심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사라진 필름은 금기어가 됐다. 해외 생활이 이어지면서 친구들과의 정신적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②왜 그는 필름을 숨겼을까
소설가가 된 탄은 2011년 뜻밖의 이메일을 받는다. 조지스의 전 아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집 지하창고에서 정체 모를 필름을 발견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탄이 주인으로 여겨져 연락을 취했다는 것이다. 조지스가 숨진 지 이미 4년. 전 아내는 조지스가 왜 필름을 창고에 두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탄은 갈수록 궁금증이 쌓인다. 조지스는 왜 자신의 필름을 가지고 사라졌을까, 필름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왜 아무 말도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까, 그는 고교 졸업반에 불과했던 자신과 친구들에게 어떤 질투심을 느끼거나 알 수 없던 증오심을 품었던 것일까.
탄은 조지스와 관련된 의문을 추격하기 위해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 그들을 인터뷰하고, 옛 필름의 장면을 활용해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간다.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되살아난다.
③유령과도 같은 잊힌 시간
20년 가까이 돼 찾은 필름은 유령과도 같다. 필름이 사라져 있는 동안 세상은 디지털 위주로 급격히 바뀌었다. 입자가 굵어 보이고 어두운 화면, 21세기와는 완연히 다른 싱가포르 풍경은 공포영화 속 장면처럼 섬뜩하면서도 고전영화처럼 아련했다. 탄이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잊은 채 살았던, 마음이 텅 빈 시절을 반영한 듯한 장면들이었다.
탄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1992년을 되돌아보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다. 탄은 옛 시절을 돌아보며 조지스의 과거를 알게 좀 더 명확히 알게 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이렇다 할 성취를 남기지 못하고 회한 속에 살다간 사람이었다. 필름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 조지스의 행동은 한편으로 이해가 가면서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확실한 건 탄이 다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친구들을 만나 상처를 극복하게 됐다는 것이다.
※권장지수: ★★★★(★ 5개 만점, ☆은 반개)
미스터리를 품은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20대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한 여성이 아픈 과거를 극복하는 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이 촬영을 다 한 필름을 잃어버리면서 감독이라는 꿈을 잃어버렸다가 필름을 되찾은 후 꿈까지 되찾는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자신들에게 친절하기만 했다가 어느 날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한 어른을 추적하는 내용은 스릴러처럼 서스펜스가 넘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수작이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99%, 시청자 79%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