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개혁·통합 외치던 국가 지도자의 추악한 실체 [왓칭]
한 나라의 정상이 잘못된 길로 빠지면, 나라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검은 돈’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 ‘정상의 책임’에서는 국민이 모은 국영펀드 45억달러(약 5조2000억원)를 빼돌려 초호화 생활을 즐긴 말레이시아 전직 총리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겉으로는 이상주의적인 구호를 외쳤지만, 실상은 천문학적인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선심성 현금 복지를 뿌리는 것은 기본이고, 반대 세력은 공권력을 동원해 억누르는 폭군의 전형이었다. 이 대규모 부패 스캔들과 관련된 기자, 정치인, 기업인들이 나서서 부패한 정권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증언했다.
◇공정, 개혁, 통합···겉보기엔 이상적인 정책과 정치 슬로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집권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겉으로 봤을 때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온화한 인상에 언변이 뛰어났다. 전직 총리의 아들인 그는 국방부 장관, 부총리 엘리트 코스를 거쳐 무난하게 총리(국가 정상)로 집권했다. 그의 정치 슬로건은 ‘하나의 말레이시아’였다. 인종과 빈부격차를 초월해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그가 강조했던 가치가 ‘공정’, ‘개혁’, ‘통합’이었다. 영국 유학파였던 그는 서양권에서도 같이 일하기 좋은 파트너였다. 집권 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집이 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대표 정책으로 내세운 것이 국영펀드인 ‘1MDB’였다. 납세자들이 낸 돈을 해외에 투자해 수익을 창출하고,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겉보기엔 이상적 정책이었다. 정상적인 국부펀드라면 투자를 통해 수익을 내거나 학교, 병원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MDB는 첫 단추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페트로사우디’라는 아무도 모르는 신생 기업에 10억 달러(약 1조10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국민 혈세 빼돌려 초호화 생활”이멜다 업그레이드 버전”
대개 정치 스캔들 레퍼토리처럼, 의문의 실세가 갑자기 등장한다. 나집의 의붓아들의 친구, 조 로우가 장본인이다. 키가 작고 통통한 중국계 인물인 그는 진웰캐피털이라는 회사 대표였는데, 아무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의 회사 홍보는 이런 식이다. “가치를 향상하고 시너지를 파악해, 효율성을 활용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해서 창의력과 전문지식을 우리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한다.” 온갖 좋은 말을 갖다 붙여 놨지만, 실체가 없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정부 최대 국영사업을 맡아 운영한 것이다.
조 로우가 즐긴 사치 생활의 맛보기가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아닐까. 그와 나집의 아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이 영화에 1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흥청망청 돈 쓰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제작비는 전부 1MDB 자금에서 나왔다. 패리스 힐튼은 조 로우의 파티에 참석할 때 노골적으로 100만 달러씩 요구했다고 한다. 조 로우는 파티 참가자에게 수퍼카 부가티를 선물로 보내주고, 수영장 옆에 사자 우리와 곡예 공연장을 차려 놨으며, 케이크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튀어나오는 퍼포먼스를 즐겼다고 한다.
나집의 아내 다틴 로스마 만소르도 사치라면 지지 않았다. 한 기자는 “로스마는 이멜다 마르코스(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부인으로 사치의 대명사로 유명했다)와 매우 비슷했는데, 다만 그녀가 훨씬 업그레이드된 버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공식 석상에 항상 다른 악어가죽 핸드백을 들고 나타났다. 홍콩 여행에선 쇼핑을 너무 많이 해 사들인 상품이 제트기 한 대 분량을 넘었다는 일화가 퍼졌다. 조 로우는 로스마에게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 단위 부패에는 공신력 있는 조력자도 필요한 법이다. 미국 국제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가 등장한다. 유흥을 좋아하던 당시 동남아 사업부 대표 팀 라이스너는 조 로우에게 좋은 사냥감이었다. 그를 꼬드겨서 골드만 삭스가 채권 발행을 대행하게 했다. 이 채권 계약은 수익금 사용처도 명시되지 않았고, 그 채권으로 모은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조차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는데, 골드만 삭스가 이를 대행한 것이다. 골드만 삭스는 이 채권을 발행해주면서 일반 수수료의 200배를 받았는데, 사실상 말레이시아 정부의 불법을 눈감아주는 대가였던 셈이다.
◇꼬리 길면 잡히는 법...드러나는 비리
무언가 잘못돼 간다는 신호는, 그 증거가 실제로 눈앞에 보일 때 가장 확실해진다. 이 정부의 대표 사업 중 하나인 툰라작 익스체인지(TRX) 건설 실패가 그중 하나였다. 당초 계획은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 TRX 금융센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말레이시아에 투자하도록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하는 게 목표였다. 2013년 착공했는데 건설비용 30억 달러를 전부 1MDB 기금으로 썼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돈을 쓰다 보니, 항상 돈이 부족했다. 그 결과, 반쯤 짓다 버려진 황폐한 공사 현장만 남게 됐다. 대부분 프로젝트가 보류되거나 중단됐고, 부채만 420억링깃(11조5000억원)에 달했다.
급기야 말레이시아 정부는 1MDB가 지게 된 부채의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다른 정부기관 돈까지 끌어다 썼는데, 성지순례기금 ‘하지 재단’ 돈까지 쓰게 됐다. 이 기금은 말레이시아 국민이 무슬림 성지순례에 가기 위해 평생 모아서 노년에 사용하는 기금이다.
‘굿스타’라는 유령회사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부패의 연결고리가 더 분명해졌다. 조 로우의 영업부장 격인 인물이 대표를 맡은 이 회사는, 1MDB 자금 7억 달러를 횡령하고 있었다. 사기 방식은 단순했는데, 국민 세금으로 모은 1MDB 자금을 유령회사인 굿스타 이름으로 숨기고, 이 돈을 자금 출처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까지 이리저리 이체시켜서 자금을 세탁하는 식이었다. 자금을 추적해 보니, 총 27억 달러가 조 로우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6억8100만 달러는 나집에게 들어갔다.
◇국가 정상이 부패의 원흉일 때 유일한 해결책은
분노한 국민은 나집에게 책임을 묻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하지만 나집은 의혹을 전부 부인하면서, 1MDB 얘기만 꺼내도 체포하고, 비판하는 언론은 폐간시켰다. 정책에 의문을 제기한 법무장관, 부총리 등 내각도 파면시키고, 국회의원은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집은 “공정한 비판은 받아들이겠지만, 일방적인 비판으로 느껴지면 괜히 정부만 곤란해지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이 다큐는 나집과 조 로우 등 측근이 1MDB 자금 총 45억 달러를 유용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에 만들어졌다. 총 42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나집은 작년 7월 이중 일부가 유죄로 인정돼 벌금 592억원과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혐의에 대한 재판도 진행 중이다. 나집은 “나는 정말 몰랐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책임져야 하지만, 책임자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탓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면서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조 로우는 현재 중국으로 도망쳐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골드만삭스는 공개 사과와 함께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내는 데 합의했다.
◇진실에 눈감고 귀 닫는 맹목적 지지자들
다큐의 뒷맛은 씁쓸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나집을 지지하는 극성 지지층이 많기 때문이다. 나집이 집권 시절 각종 지원금 명목으로 살포한 현금성 복지가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시골 어부들은 “나집이 다른 사람들 돈을 훔치긴 했지만, 그 돈을 국민을 위해 썼다. 그는 국민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돈 안 훔치는 정치인이 어딨느냐. 해외에서도 다 그러는데 뭐가 문제냐”고 했다. “정권을 뺏긴 건 거짓과 음모론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집의 극렬 지지자들은 그를 “나의 대장”이라고 외친다. 나집이 뻔뻔하게 “내가 재임할 때와 지금(야당 집권 상황) 중 언제가 나으냐”고 물으면 “당연히 나집 때가 낫다”고 외친다. 나집이 지지층 속에 둘러싸여 한가롭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다큐는 끝이 난다.
아직 재판 중이라곤 하지만, 이쯤 되면 비리는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나집을 처벌하더라도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는 남는다. 국가 도로나 학교를 짓는 데 쓰여야 할 돈이 1MDB 부채를 갚는 데 쓰이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이 앞으로 수십 년 간 이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진실을 외면하고, 나라 경제를 망친 전직 지도자를 감싸고 돈다. 힘을 합쳐 나라 재건에 힘을 써도 모자란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만 유발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이 맹목적인 지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큐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개요 범죄 다큐멘터리 l 미국 l 15세 l 57분
특징 나라 말아먹는 국가 지도자의 민낯
평점 IMDB 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