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님, 그래서 저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요? [왓칭]
넷플릭스 다큐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평범한 나'를 위한 정치인은 어디에
성추행’으로 시작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가 ‘생태탕’과 ‘페라가모’로 마무리됐다. 후보 12명에, 선거 비용만 487억을 썼는데, 투표가 끝나고 시민들 기억에 남은 건 ‘생떼탕’뿐이다. 아무리 임기 15개월짜리 반쪽 시장이라지만, 950만 인구의 도시 수장을 뽑아 놓고 뇌리에 박힌 공약 하나 없는 게 씁쓸하다.
원제는 ‘녹 다운 더 하우스(Knock down the house)’. 번역하면 ‘하원을 때려눕히다’ 정도가 되겠다. 거대 정치 권력에 맞서 ‘정책’ 하나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이들의 도전기를 그렸다.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넷플릭스가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내고 배급권을 가져가 화제가 됐다.
◇풀뿌리 민주주의란 이런 것
2018년은 여성과 유색 인종을 비롯해 정치적 입지가 약한 사람들이 대거 국회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던 해다. 다큐멘터리는 그 중 광부의 딸인 폴라진 스웨어런진, 의료제도 문제로 딸을 잃은 에이미 빌레라, 경찰의 흑인 소년 총격 사건을 목격한 간호사 코리 부시, 그리고 주인공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의 선거 분투기를 담았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는 미국 뉴욕 브롱크스 출신의 남미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2세다. 선거 당시 겨우 29세. 버니 샌더스 캠프 봉사활동과 비영리단체 근무가 경력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압류 위기에 처하면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와 바텐더로 일하며 매달 300달러씩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비를 벌었다.
이런 정치 초짜가 14년 간 민주당 경선에서 적수가 없던 10선 의원 조 크롤리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그는 기업 후원으로만 선거자금 330만 달러(37억원)를 마련한 민주당 내 서열 3위 거물 정치인이다. 선거 자금이라곤 2달러뿐이던 20대 여성 후보가 “나는 기업의 정치 후원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당 지도부와 맞서 싸운다.
다른 세 명 후보 사정도 비슷하다. 이들은 티셔츠를 입고 집집마다 돌며 공약을 설명한다. 시민들 한 명 한 명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길거리에서 고군분투한다. 전화를 돌리며 “50 달러도 큰 힘이 된다”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느냐”며 읍소해 자금을 모은다. 학창시절 배운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석이다. 코르테즈가 이렇게 모은 돈은 겨우 30만 달러(3억 3000만원). 크롤리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정책 실종' 선거의 씁쓸한 뒷맛
결론부터 말하면 코르테즈는 민주당 경선에서 조 크롤리를 그야말로 때려눕힌다. 이후 본선에서 78%를 득표하며 공화당 후보를 꺾고 사상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트럼프 이후 가장 흥미로운 정치인’ ‘웨이트리스 출신 정치스타’라는 수식어를 얻는다.
비결은 뭐였을까. 코르테즈는 집으로 도착한 조 크롤리의 선거 공보물을 보며 분노한다. 화려한 공보물엔 온통 ‘트럼프 심판’ 뿐이다.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항하기’ ‘도널드 트럼프에 대항하는 싸움을 이끌고 있습니다’… 공약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엄마 꼭 이겨, 엄마는 할 수 있어’란 한 후보 공약이 떠오른다.
그는 조 크롤리와 자신을 ‘전략가’와 ‘행동가’로 비교한다. 전략을 세우고 이미지를 만드는 크롤리와 달리, 본인은 ‘행동하는 후보’라는 전략이다. ‘메디케어를 개선하고 확장한다’ ‘마약과의 전쟁을 벌인다’ ‘소수를 위한 사치 주택이 아닌 다수를 위한 주택’ ‘등록금 없는 공립대’ 등 다섯 가지 공약으로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나'를 위한 후보 어디 없나
“미국인들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먹고 살기만 하면 돼요. 먹고살 수 있도록 정치인들이 용감하게 나서주길 바랄 뿐이에요”.
그가 말하는 미국의 상황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텐더로 일하며 하루 18시간 동안 서서 일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경험이 그의 자산이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을 대표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출마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껏 시민들이 약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후보를 지지했는데, 왜 20년 동안 월세는 인상됐고, 의료보험은 비싸졌고, 소득은 제자리였는지를 묻는다.
우리나라에도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겠다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 후보들이 있다. ‘페미니스트 정치’ ‘여자 혼자도 살기 좋은 서울’을 내세운 이들에게 490만명 중 7만 4000명이 표를 줬다. 특히 20대 이하 여성의 지지(15.1%)가 도드라졌다. 그러나 이들을 지지하려면 사표를 각오해야 했다. 코르테즈의 전략은 달랐다. 20대이고 여성이며 이민자 출신이지만, 평범한 모두를 포용했기에 당선됐다.
◇거대 권력에 맞서는 한 인간의 도전기
선거나 지지 정당을 떠나 거대 권력에 맞서는 한 인간의 도전기라는 측면에서도 볼만한 작품이다. 코르테즈는 선거운동을 돕는 어린 조카가 외면하는 시민을 맞닥뜨리고 멋쩍어 하자, “잘하고 있어. 열 번 거절당해도 한 번은 받아주잖아. 모든 일에서 그렇게 승리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거물 정치인과의 첫 TV토론 전엔 마음을 다잡으며 홀로 되뇐다. “난 할 수 있어. 난 충분히 경험이 있어. 난 충분히 지식이 있어. 준비도 충분히 했어. 난 충분히 성숙해. 난 충분히 용감해” 그 믿음과 자신감이 결국 그를 승리로 이끈다.
나머지 세 명의 여성은 후보에서 탈락한다. 코르테즈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한 명이 성공하려면 우리 같은 사람들 100명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게 현실이에요”. 그와 함께 출마했던 흑인 여성 후보 ‘코리 부시’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2018년엔 거물 정치인에게 패배했다. 2020년 같은 정치인을 상대로 승리해 현역 의원이 됐다.
개요 다큐멘터리 l 2019 l 미국 l 1시간 27분
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IMDb⭐7.1/10 로튼토마토🍅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