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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소식[시네마 클래식] 백인 행세하는 흑인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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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숲속의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신고 회원메모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movieli.st 작성일21.12.16 06:47 3,14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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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클래식] 백인 행세하는 흑인들

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영화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김성현 기자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패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넷플릭스 ‘패싱(Passing)’ /넷플릭스
 넷플릭스 ‘패싱(Passing)’ /넷플릭스

 

영화 ‘패싱(Passing)’은 미 여성 소설가 넬라 라슨(1891~1964)의 원작에 바탕한 넷플릭스 신작입니다. 잠깐 제목의 의미부터 짚고 넘어갈까요. ‘패싱’은 최근 유행하는 ‘패싱 논란’ 같은 신조어 때문에 자칫 무시하거나 건너뛴다는 의미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간주하기’ ‘여기기’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1920년대 흑인 사회에서는 옅은 피부색 때문에 백인으로 가장하고 살았던 흑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민음사 판 소설에는 ‘백인 행세하기’라는 친절한 부제가 붙어 있지요.

영화는 1920년대 뉴욕 할렘에 사는 흑인 주부 아이린이 호텔에서 어릴 적 친구 클레어와 조우하는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클레어는 시카고의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고 백인으로 가장한 채 살고 있지요. 바로 ‘패싱’입니다. 클레어가 아이린의 흑인 세계로 돌아오면서 이들의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지요.

영화는 얼핏 별다른 극적 사건이 두드러지지 않는 일일 드라마처럼 흘러갑니다. 흑백 영화인 데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 같은 장면 전환 방식과 화면 비율 때문에 복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요. 그런데도 시종 폭발적인 긴장감이 감도는 건 현재 미국 사회의 뇌관인 인종적 정체성을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거리 등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흑백의 대조를 분명하게 드러내지요.

'패싱'의 원작 작가 넬라 라슨.
 '패싱'의 원작 작가 넬라 라슨.

흥미로운 건 이 영화의 탄생 배경에는 이중의 혼혈이 겹쳐 있다는 점입니다. 원작 소설을 쓴 넬라 라슨은 1920년대 흑인 문화 예술의 만개를 일컫는 ‘할렘 르네상스’의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서인도제도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하지만 라슨이 어릴 적 친부와 친모는 헤어졌고, 어머니는 백인 남성과 재혼하게 됩니다. 백인 가정의 혼혈 딸이라는 독특한 가족사 때문에 라슨은 백인과 흑인 사회 양쪽에 편입되는데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영화 '패싱'의 감독 레베카 홀.
 영화 '패싱'의 감독 레베카 홀.

이 소설을 영화화한 감독 겸 배우 레베카 홀의 가족사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피터 홀(1930~2017)은 영국의 전설적인 연극·오페라 연출가였지요. 피터 홀은 불과 25세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영국 초연했고, 29세에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를 창단했습니다. 혼혈인 어머니 마리아 유잉(71)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를 모두 소화했던 성악가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페라 연출가와 성악가로 즐겨 호흡을 맞췄지요. 원작 작가와 감독 모두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원작과 영화 모두 흑인 여성 주인공 아이린의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사뭇 온도차가 존재합니다. 원작 소설이 분노와 당혹감 같은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면, 영화는 반대로 감추는 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원작이나 영화 모두 후반부로 가면서 감정적 극한으로 치닫게 되지요.

넬라 라슨의 원작 소설 '패싱'
 넬라 라슨의 원작 소설 '패싱'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편안하게 난롯불을 쬐던 아이린은 난생 처음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흑인이라는 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웠고 반항심이 들었다. 인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여자로서,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흑인들만큼 저주받은 존재는 없었다.”(넬라 라슨 ‘패싱’ 196쪽 민음사)

개인적으로 현대적 문제 의식과 고전적인 전개 방식이 맞물려 있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 인종이라는 주제가 와닿지 않는다면 계층이나 성별, 지역으로 치환하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요. 좋은 작품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보편성입니다. ‘패싱’은 그 미덕을 갖추고 있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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