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K콘텐츠는 왜 오후 5시에 공개될까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화 영향
우리 시간으로 오후 5시는
미국 LA에서는 밤, 프랑스 파리는 아침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가 시상하는 2021년 ‘올해의 음반’(Record of the Year)에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버터’(Butter)가 선정됐다. 지난 3일 오후 5시에는 '버터'를 연말 분위기에 맞춰 편곡한 '버터 홀리데이 리믹스'가 전 세계 동시 공개됐다./버라이어티
오후 5시. 저녁이라고 하기에도, 낮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문화 생활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이 시간대가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드라마, 예능, 음악, e스포츠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K콘텐츠’가 오후 5시에 공개되고 있다.
하루가 처음 시작되는 자정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6시도 아니다.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춘다는 의미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저녁보다 이른 시간인 오후 5시에 문화 콘텐츠가 발표되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지난 3일 방탄소년단(BTS)은 새 음원을 오후 5시에 발표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 ‘핫 100′에서 10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미국 연예잡지 버라이어티 선정 ‘올해의 음반’(Record of the Year)에 오르기도 했던 노래 ‘버터’(Butter)를 연말 분위기에 맞춰 새로 편곡한 음원이다. 소속사 하이브에 따르면, BTS 신규 음원이 오후 5시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 최다 구독자를 지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도 글로벌 콘텐츠를 이때 공개한다. 전 세계인이 열광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것도 지난 9월 23일 오후 5시다. 뒤이어 세계 1위에 오른 드라마 ‘지옥’도 넷플릭스에서 지난달 19일 같은 시각부터 시청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하이브 측은 “미국 LA(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BTS 콘서트에 대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현지 시각으로 자정에 발표했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담당자도 “‘오징어 게임’과 같은 글로벌 콘텐츠는 넷플릭스 본사가 위치한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시각으로 자정에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즉 미국 서부 시간대인 ‘태평양 표준시’(PST) 기준으로 자정에 발표된 것이다. 이는 한국 시각으로 오후 5시에 해당한다. ‘오후 5시 공개’는 K콘텐츠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향유하는 콘텐츠로 진화했다는 방증(傍證)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해외 시청자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국내 전용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8일 오후 5시 왓챠에서는 옴니버스 이제훈 등 젊은 배우 4명이 감독 도전에 나서 촬영한 옴니버스식 단편영화 시리즈 ‘언프레임드’를 발표했고, 같은 시각에는 유명 MC 이경규가 출연하는 카카오TV 예능 프로그램 ‘찐경규’의 새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오는 22일 티빙은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 특별판’을 오후 5시에 공개할 예정이다.
나아가 글로벌 팬을 고려해 시점을 오후 5시보다 더욱 앞당기기도 한다. 지난달 아이돌 그룹 ‘세븐틴’의 두 차례 온라인 콘서트는 모두 오후 5시에 열렸지만, 12일 온라인으로 생중계되는 엑소 ‘카이’의 콘서트는 오후 3시 시작된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시간 오후 3시는 미국 LA에서는 오후 10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오전 7시여서 전 세계 팬들이 두루 즐길. 수 있는 시간대”라고 말했다.
코로나 방역 문제로 오프라인 행사가 단축된 것도 ‘보다 이른 시간’을 선택하게 했다. 12일 오후 5시 결승전을 앞둔 e스포츠 대회 ‘2021 리그 오브 레전드 KeSPA Cup ULSAN’는 이틀 전 첫 경기를 오후 3시에 치렀다. 한국e스포츠협회 관계자는 “e스포츠 리그 경기는 보통 오후 5시 시작인데, 코로나 관계로 대회 기간이 2주에서 3일로 줄어 경기 시작을 앞당겨야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글로벌 팬들을 위해 현지 시간대를 변경하는 사례는 실시간 중계가 중요한 해외 프로스포츠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의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의 프로축구 ‘프리미어 리그’는 2000년대부터 현지 시각으로 주말 정오에 시합을 열기 시작했다. 시차를 고려해 당시 박지성 선수 등을 응원하는 아시아 팬들이 오후 9시쯤 경기를 시청할 수 있도록 한 것. 이 때문에 늦은 오후나 저녁 시간에 경기장을 찾던 현지의 축구 관람 문화도, 빈속에 경기를 보고 나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바뀌게 됐다.
문화 콘텐츠 감상 환경이 ‘모바일’로 이동한 것도 시간대 변경의 이유다. 케이블 채널 ‘MBC M’의 음악방송인 ‘쇼! 챔피언’은 지난 6월 방송 시간을 수요일 오후 6시 시작에서 오후 5시로 변경했다. 관계자는 “음악방송 주 시청층인 학생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하교 길에 시청하거나, 방송이 끝난 당일 다시보기를 통해 감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파악했다”며 “실제 변경 후에도 시청률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주말에 방송되는 SBS 인기가요와 MBC 음악중심이 오후 3~4시 편성일 뿐만 아니라, KBS는 금요일 음악 프로그램 ‘뮤직뱅크’를 지난 2016년부터 기존 오후 6시 20분에서 앞당겨 오후 5시에 방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