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K콘텐츠 위력'…지옥
매일신문 입력 2021-11-25 19:22:46 수정 2021-11-25 19:22:46
넷플릭스 공개 하루 만에 시선집중…오징어게임과 '세계 1위' 바통터치
괴생명체 공격에 사람 죽고 지옥행…모두 앞에서 죄 시인하고 죽음 중계
"이러한 기괴한 일들은 신의 계시다" 신흥 종교 '새진리회' 세력 키워나가
불가항력적 존재가 만든 인간군상…신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 던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다. 도대체 '지옥'의 무엇이 이 같은 반응들을 만들고 있는 걸까.
◆무엇이 다른가
지난 19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공개됐다. 연 감독의 야심작으로 공개 이전부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작품이고, 넷플릭스 또한 '오징어게임' 이후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았던 작품이다. 그러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일까. 아니면 '오징어게임'이 만들어낸 후광효과 때문일까. '지옥'은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서 전 세계 1위 TV시리즈로 급부상했다.
'지옥'이 1위에, '오징어게임'이 2위에 나란히 오르는 이례적인 광경 또한 연출됐다. 물론 이 순위는 하루 만에 바뀌었다. 세계적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인 '아케인'이 1위를, '지옥'이 2위를 기록했고 '지옥'과 함께 서비스를 시작한 '카우보이 비밥'이 3위, 그리고 '오징어게임'이 4위에 올랐다.
워낙 세계적인 팬덤을 갖고 있는 게임의 애니메이션인지라 '아케인'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지옥'에 이처럼 단기간에 쏟아진 관심과 기대는 그간 K콘텐츠가 만들어낸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적어도 K콘텐츠 중 대작이 등장하면 전 세계인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는 걸 '지옥'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중요한 건 이러한 관심사를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작품의 성취다. 그런 점에서 봐도 '지옥'은 분명 독특한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 한복판 백주대낮에 나타난 괴생명체(이들을 사람들은 '지옥의 사자'라 부른다)가 잔혹하게 한 사람을 죽이고 순식간에 뼈의 형상만 남은 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죽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사전에 지옥행을 하게 될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는 이른바 '고지'가 선행된다. 고지를 받은 자들은 결코 이 지옥행을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자살을 해도 그 영혼까지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크리처물(갑자기 괴생명체가 나타나 묵시록적인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장르)처럼 드라마가 흘러간다. 그런데 '지옥'은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통의 크리처물들은 이러한 괴생명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등장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그려 나가며 거기서 탄생하는 영웅을 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옥'은 이러한 사투나 영웅의 탄생을 그리지 않고 심지어 괴생명체에 대한 궁금증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죽을 날을 알게 된(고지를 받게 된) 인간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정진수(유아인)는 이러한 일들이 그냥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와 '의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설파하며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를 일으킨다. 그들이 그런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지를 받은 자들은 그래서 그 자체로 대중들의 손가락질과 지탄을 받고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신상이 털리는 등의 핍박을 받는다. 화살촉이라는 새진리회를 신봉하는 이들은 일종의 자경단이 돼 이런 폭력적인 일들에 앞장선다.
고지를 받은 채 죽을 날을 앞두고 있는 박정자(김신록)는 자신이 죽는 그 순간을 생중계하자는 새진리회 정진주의 제안을 수락한다. 대가로 제안된 30억원을 남은 아이들에게 남겨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의 순간이 생중계되고 그 공포를 통해 새진리회는 세력을 확장해간다. 전형적인 크리처물의 문법을 벗어나, '지옥'은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만들어내는 인간군상을 통해 신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경쾌한 장르물에 담아낸 진중한 질문들
'지옥'을 보다보면 마치 신의 존재를 몰랐던 원시시대에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으로 누군가 처참한 죽음을 맞았을 때 그걸 목격한 이들이 가졌을 당혹감이 느껴진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천재지변으로 생겨난 누군가의 죽음을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든 그것에 의미를 찾으려 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질서를 부여하려 했을 게다. 죽음의 순간을 애도하고 의례로 만들려는 노력도 생겼을 게다.
'지옥'에서 새진리회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한 '질서'가 무너질 때 세상은 진짜 종말을 맞을 것이라 말한다. 즉 아무 의미도 없고 의도도 없는 삶과 죽음을 드러내는 저 불가항력적인 괴생명체들의 '지옥행'에 새진리회는 의미를 부여하고 모두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죽는 과정을 '시연'함으로써 의례화한다. 그들의 죽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새진리회의 이런 말들이 거짓이라는 사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를 일으킨 정진수가 바로 그 첫 사례다. 알고 보니 그는 일찍이 고지를 받은 자였다. 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죄를 지어야 지옥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자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신이 왜 그런 기묘한 일을 벌이는 걸까요. 저는 10년이 넘는 시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근데 그걸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런 기괴한 일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이 말에는 정의로 대변되는 국가가 부여하는 법질서가 선악으로 나뉘어 착한 자는 천국에 들고 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종교적인 설법 같은 것들이, 불가항력 앞에 내던져진 가녀린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옥의 사자라 불리며 나타난 괴생명체들이 사람들을 마구 해치는 크리처물처럼 시작한 드라마는 이 즈음에 이르러 신의 탄생이나 정의의 문제 등을 묻는 작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후반부에 이르면 마치 디스토피아 버전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이나 부활 같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재해석한 듯한 장면들 또한 등장한다. 향후 시즌2로 이어질 연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철학적 질문도 대중물로 엮어내
'지옥'이 독특한 건 '지옥의 사자'라 명명된 괴생명체라는 캐릭터다.사실 이 캐릭터는 운명이나 죽음, 재난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형상화한 존재들이다. 즉 어찌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하나의 캐릭터로 구현해낸 것. 이 괴생명체들은 인간은 아니지만 얼굴과 팔다리, 몸통을 가졌다.
게다가 그들이 나타나 고지를 받은 인간을 죽이는 과정은 심령적인 현상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대신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물리적인 폭력이 벌어진다. 이러한 캐릭터로 구현된 존재들 덕분에 '지옥'의, 신과 인간에 대한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있는 이야기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최근 해외에서 주목받는 K콘텐츠의 특징이기도 하다. '오징어게임'이 자본화된 경쟁사회를 풍자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데스 서바이벌 장르를 통해 대중성을 확보한 것처럼, '지옥' 역시 신과 인간이라는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메시지를 크리처물과 스릴러 장르로 구현해내고 있다.
따라서 '지옥' 역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장르물의 재미를 따라가면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와 담론을 제기하는 드라마가 됐다. K콘텐츠에 일관되게 추구되는 이러한 특징들은 그래서 글로벌 대중들에게는 향후 등장할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어딘가 장르물에 충실한 재미를 주면서도 진지한 주제 의식 또한 놓치지 않는 작품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