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색한 미국인들조차..." 외신이 짚은 '오징어 게임' 돌풍 이유
[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한국적 장르'는 어떻게 세계를 접수하고 있나
21.10.08 19:17최종 업데이트 21.10.08 19:28
▲ 영화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지구촌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넷플릭스가 진출한 전 세계 83개국 전체 시청률 1위라는 '그랜드슬램' 달성 후 여전히 전 세계 누적 인기 순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영화-드라마가 <기생충> <미나리> 등에 이어 <오징어게임>으로 유례없는 황금기를 이어간다.
이 황금기가 반짝 호황이 아닌 더 큰 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7일자 미국의 <블룸버그>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제조업에 이어 또 하나의 경제 성장을 이끄는 주요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서 <오징어 게임> 이후 이들의 문화 산업 관련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옥자> <킹덤> <승리호> 등으로 한국 영화-드라마의 가능성을 확인한 넷플릭스는 이번에 <오징어 게임>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매출 이익의 상당 부분이 넷플릭스에 귀속될 것이라는 예상은 있지만, 향후 한국 영화에 대한 글로벌 투자 전망이 어느 때보다 밝은 것도 사실이다. 이는 분명 영화 제작을 포함 관련 분야에 청신호가 아닐 수 없다.
벌써부터 구체적이면서 소소한 상품들이 외신을 통해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사시주간지 <뉴스위크>는 10월 첫 주 기사에서 <오징어 게임> 참가자 67번이 방문하고 싶어 한 제주도가 어떤 곳인지 소개했다. 이 기사는 제주도를 '한국의 하와이'라고 소개하면서 이곳 주민들은 <오징어 게임>의 열기가 올라가면서 더 많은 방문객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넷플릭스 진출국 가운데 가장 늦게 <오징어 게임> 1위 기록에 합류한 인도의 일간지 <인디언엑스프레스>는 7일자 보도에서 갑작스러운 달고나 열풍을 소개했다. 이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널리 소개된 달고나 과자가 <오징어 게임> 이후 인기를 더해간다는 것이다. 2018년 개설한 한 달고나 레시피 소개 사이트의 조회수가 최근 며칠 사이 30% 증가했다고 이 신문은 소개하고 있다.
▲ <인디언엑스프레스>는 7일자 보도에서 갑작스러운 달고나 열풍을 소개했다. ⓒ 인디언익스프레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6일 보도에서 벌써부터 올해 할로윈 축제 의상으로 오징어 게임이 인기라고 귀띔한다. 구체적인 가격까지 소개하는 이 신문은 하지만 DIY를 좋아하는 오징어 게임 팬이라면 일반적인 트레이닝복에 숫자 명찰만 붙여도 이들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권한다.
한국 영화 신드롬이 이어지면서 성공 비결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세련된 플롯 구성, 독특한 소재 등 영화적 요소들을 꼽을 수 있고, 한국 사회라는 낯선 배경에서 오는 참신함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이어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국 영화-드라마에는 분명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 <월스트리트저널>은 6일 보도에서 벌써부터 올해 할로윈 축제의 의상으로 오징어 게임이 인기라고 귀띔한다. ⓒ 월스트리트저널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공통점
공포를 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웃음을 유발한다. 웃느라 긴장을 풀었더니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웃픈' 감정에 익숙한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표현법일까? 이들의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감정을 미리 준비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혼란스러운 나는 티브이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다 어느새 이번에는 소파 쪽으로 몸을 밀기 시작한다. 마치 티브이로부터 도망이라도 치듯 […] 이는 가장 암울한 블랙 코미디이며 […] 그런 극단적 내용을 재미로 포장했다.
미국의 한 엔터테인먼트 기자가 1일 웹 시사지 <데일리 비스트> 칼럼을 통해 전한 <오징어 게임> 감상 소감이다. 그는 외국 대중문화에 인색하고 까다로운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것이 '외국어'로 된 <오징어 게임>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폭력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는 폭력을 보여주지만 결코 무감각한 시선으로 폭력을 보지 않게 한다고 촌평한다. 요컨대 이 영화는 자본주의와 계급사회에 대한 토론으로 관객을 초대하면서 결코 투박하지 않은 방식을 택한다.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정글과 같은 우리 사회에 조용히 던져 놓은 일종의 '트로이 목마' 같은 존재다.
한국인들은 풍자에 익숙하다. 물론 다른 문화권에 풍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풍자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코드가 있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비판과 조소를 던지지만 자신이 상황에서 비껴 서 있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 익살스러운 피해자가, 심지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두 역할을 번갈아 오가기도 한다.
<기생충>의 기택은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유일한 수단으로 반칙을 선택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해자로 둔갑해 가지만 왠지 어설프다. 어울리지 않는 가해자의 모습이 이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마음을 놓는 순간 어설픈 그는 살벌한 가해자로 돌변한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 영화 <기생충> 포스터 ⓒ CJ ENM
<오징어 게임>의 기훈 역시 능력과 무관하게 불공정 사회의 피해자이면서 낙오자다. 그러면서도 <기생충>의 기택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회에서 도도한 고발자가 아니라 틈만 나면 반칙으로 탈출을 꿈꾸는 소시민이다. 착한 마음씨를 가졌지만 무능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매번 실망시킨다. 인생 역전을 꿈꾸며 죽음의 모험을 감행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또 반칙을 택한다.
기택과 기훈. 이들은 과연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부조리한 사회 안에서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누구든 둘 다 피하고 싶겠지만, 모두가 운명처럼 그 앞에 내몰려져 있다. 원하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물론 부여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자유마저 배신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자유는 진짜 자유일까?
희극인 듯 희극 아닌, 비극인 듯 비극 아닌
그런 의미에서 <오징어 게임>은 유사한 다른 게임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각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하지만 모든 스토리텔링은 몇 가지의 소수 원형(archetype)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표절이라고 하면 하늘 아래 표절이 아닌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원형에 시대적 배경과 사건의 동기, 인물 간 관계 설정, 플롯의 재구성을 통해 다양한 현실에 대한 독창적 은유로 재탄생시키느냐에 달렸다.
다른 게임 소재 영화나 소설과 달리 <오징어 게임>은 놀이의 본질적 요소에 역설적 변이를 교묘히 대비시킨 천재적 상상력을 보여줬다. 문화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는 놀이의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로 '자발적 참여'를 이야기한다. 세밀한 규칙, 공정한 심판, 극적 요소를 잘 갖춰도 재미를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놀이가 될 수 없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도전자들은 본인들이 원해서 참석했고, 진행 도중 본인들이 원하지 않아 기권했으며, 다시 본인들의 희망대로 재도전에 나섰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이들은 정확히 '놀이'에 참여한 셈이다. 이 무시무시한 놀이를 주최한 사람들도 표면적으로는 도전자들의 선택을 철저히 존중했다.
하지만 이들이 게임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간 현실은 너무나 달콤하고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이들을 위한 것은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결국 다시 죽음의 게임 속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마치 밀턴 프리드먼을 빌려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싱싱하지 않는 음식의 자유를 주자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삶의 대반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은 공교롭게 그들이 아무 걱정 없던 어린 시절 즐겨 놀았던 게임들이었다. 어릴 때 익혔던 유희의 규칙이 성인이 되어 생사를 가늠하는 규칙이 돼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선택의 자유'인가.
▲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놀이의 세계는 억제된 무의식적 욕망을 가상의 세계에서 실현하게 해주는 해방구다. 그 속에서 경쟁은 소통의 경쟁이고 화합의 경쟁이다. 따라서 본질적 의미에서의 놀이에서는 패자에게도 물질적으로 잃는 것이 없다. 승자에게도 물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다. 그것이 놀이와 노름의 차이다. 그리고 그것이 놀이가 축제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인들이 봉준호와 황동혁에 열광하는 것은 이처럼 유토피아의 꿈이 어떻게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는가 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희극적 요소 속에 섞어 은밀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유쾌했지만 섬뜩했다. 불편했지만 위로도 받았다.
봉준호와 황동혁은 이 시대의 몰리에르(Molière)이면서 동시에 라신(J. Ricine)이다. 희극인 듯 희극 아닌, 비극인 듯 비극 아닌, 이것이 지금 세계인을 흥분시킨 한국적 장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