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극장전]아프간의 오늘, 이 소녀가 떠오른다
2021.09.06ㅣ주간경향 1443호
탈레반이 돌아왔다. 2001년 미국의 군사개입으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쫓겨나 남동부 산악지대로 퇴각한 지 20년 만의 귀환이다. 하필 8월 15일 광복절에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의 투항 선언이 있었던지라 국내 일각에선 반외세 민족주의 투쟁의 승리라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반군으로 전락했던 시절에 온건합리주의를 조금이라도 갖추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는 아직 미지수다.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이다. 탈레반의 다수는 파슈툰족이긴 하지만 과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족 중심세력이란 점에서 이들이 과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이란 명칭으로 통치하던 시절의 암담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 daum영화
당시 탈레반은 세계문화유산 바미얀 석불을 폭파한 것은 물론 일체의 문화예술을 우상숭배로 규정해 극장도, 춤과 노래도 사라졌다. 교육은 탈레반의 억지 해석에 의한 쿠란 학습 외엔 중단되고, 여성의 교육과 사회참여는 사실상 폐지됐다. 당시 아프간 교사와 의사의 상당수가 여성임에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샤리아 관습법을 위반하는 여성과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종교심판과 테러가 횡행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악몽은 부활하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은 탈레반 1차 집권 시기(1996-2001)에 수도 카불에서 살아가는 소녀 파르바나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캐나다 여성 작가 데보라 엘리스가 쓴 전 4권 동화다(국내 전권 번역 출간). 탈레반 치하에서 감옥에 갇힌 아빠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소녀 파르바나의 시선으로 탈레반 정권의 억압적 실상과 성차별,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를 그렸다. 원작자가 수개월간 파키스탄 국경 난민촌에서 함께 지내며 방대한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수도 카불의 음울한 풍경이 일품이다.
원제목인 <브레드위너>는 빵을 버는 자, ‘가장’을 뜻한다. 탈레반은 보호자 남성 없인 여성의 외출을 일절 금한다. 파르바나의 가족은 아빠와 어린아이인 남동생 외엔 전부 여성이다. 쌀이 떨어져도 상점에 갈 수 없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간다. 결국 파르바나가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한 채 소식을 전하고 식량을 구해온다. 종교경찰이 24시간 감시하는 거리에 나서는 것은 소녀에겐 공포의 시간이다. 파르바나는 자신과 같은 남장소녀 친구를 만나고 언제 탄로 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해방감을 맛본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 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 고증 수준은 실사영화를 뛰어넘는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지 모른다는 기대로 환영했던 탈레반이 어떻게 그 기대를 배반했는지, 반외세 자주화가 아니라 전근대적 가부장제가 종교의 외피를 쓴 채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지 탈레반의 비합리적 실태가 끊이지 않는다. 작품은 아프가니스탄이 반세기 넘게 전쟁에 시달려 실패 국가가 됐음에도 오랜 문명을 자랑하던 땅임을 잊지 않고 소개한다. 파르바나의 아빠가 시장에서 딸에게 들려주던 찬란한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침략했던 기억 부분만 소화해도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 당장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야 하니 마니 하기 전에 그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한 것은 아닐까?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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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2108301103581#csidx30782410d8c9e3d83a9735bbef8a4d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