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진의 계정공유] '더 체어', 그 의자에 앉은 것이 과연 성공일까
명문대 영문학과장 된 한국계 여성의 고군분투, 산드라 오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
2021.08.31(화) 09:46:10
[비즈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체어’를 기대한 이유는 명확했다. 산드라 오가 주연이라는 것. 산드라 오가 가상의 미국 명문대학 영문학과 최초의 여성이자 유색인종 학과장을 맡았다는 것. 물론 그 기대는 알량한 ‘국뽕’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이 ‘산드라 오’라서다.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무려 10시즌까지 시청한 것도 산드라 오가 연기하는 ‘크리스티나 양’을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한국계 배우인 산드라 오가 원톱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체어’. 8월 20일 공개 이후 스트리밍 영상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았다. 산드라 오는 이 시리즈에 프로듀서로도 참여했다. 사진=넷플릭스
‘그레이 아나토미’로 전 세계에 매력을 떨친 산드라 오가 ‘킬링 이브’로 열연을 펼친 이후 원톱 주연으로 나선 드라마가 ‘더 체어’다. 게다가 ‘김지윤’이라는 한국 이름의 한국인 캐릭터를 맡았으니 산드라 오를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면 호기심이 들 만하다.
‘더 체어’는 김지윤(산드라 오)이 펨브로크대학 영문학과 학과장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가상으로 설정된 펨브로크대학은 아이비리그 끄트머리쯤 위치한 명문대로 보이는데, 문제는 지윤이 맡은 과가 영문과라는 거다. 국내에서도 국문과는 취업 기피 학과 정도로 인기가 낮다. 미국이라고 상황이 다를 리 없다. 각박한 현실에서 각자도생하려는 MZ세대에게 자국어로 된 문학은 현실에 밀려 케케묵은 소리로 치부되곤 하니까. 에밀리 디킨슨이나 T.S. 엘리엇의 시를 읊고 해석하는 것보다 코딩을 배우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이자 유색인종으로는 최초로 펨브로크대학 영문학과 학과장이 된 40대 싱글맘 김지윤(산드라 오). 그러나 좋아 보였던 자리는 구조조정의 압박과 동료 교수들의 뒤치다꺼리로 점철된 고군분투의 자리였다. 사진=넷플릭스
학과장을 맡은 김지윤의 포부는 컸다. 비인기 학과로 전락한 영문과에 활기를 불어넣어 과거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되살리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젊고 실력 있는 여성 흑인 교수인 야즈(나나 멘샤)를 종신 교수로 임명해 학과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으나 고루한 남성 노교수의 견제를 받고, 야즈에게 올해의 최우수 강의상을 주려 하지만 인기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X파일’ 시리즈의 그 배우가 실제 이름으로 출연한다)를 끌어들이려는 학장의 야심 찬 계획에 부딪친다. 전 학과장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영문학과의 간판인 빌 돕슨(제이 듀플라스)이 아내와 사별한 후 엉망진창인 채 살아가며 사건 사고를 벌이는 것도 해결해야 한다. 같은 여성인 지윤을 지지하는 종신 교수 조앤(홀랜드 테일러)을 비롯해 영문학과를 지켜온, 나이와 연봉은 많고 수강 학생들은 적은 원로 교수들을 구조조정하라는 학장의 압박도 시시각각 덮쳐온다.
백인 남성이 주류를 차지하는 영문학과. 영문학 연구에 지대한 공헌이 있는 원로 교수들이 즐비하지만, 지금은 고루한 교수법으로 학생들에게 외면 당하는 처지다. 지윤은 이들을 으르고 달래는 동시에 학생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강의를 선보이게 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게다가 지윤에게는 지윤을 달가워하지 않는 입양한 멕시코계 딸 주희, 지윤이 빌과 ‘썸’ 관계로 지내는 게 못마땅한 연로한 아버지, 4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지윤을 입방아에 올리는 친척들과 한인 사회도 있다. 꿋꿋이 한국어로만 말하는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입양한 딸 주희는 툭하면 사라지거나 괴기한 그림을 그려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상황이라 학과장이 되어 골머리를 앓는 지윤의 상황을 더욱 갑갑하게 만든다.
‘더 체어’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드라마다.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아시아계 여성 지윤이 영문학과 최초의 여성이자 유색인종 학과장을 맡은 것은 ‘아메리칸드림’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침몰해가는 배의 항해사 같은 처지다. 회사로 따지면 아래로 치받는 후배들과 위로 찍어 내리는 상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중간관리자 같은 처지라ㄹ까.
원로 교수인 조앤(홀랜드 테일러)과 신진 교수인 야즈(나나 멘샤), 그리고 학과장인 김지윤. 이들은 인종도, 연령도, 처지도 다르다. 상황에 따라 반목하기도 하지만 고루한 명문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같은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연대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사진=넷플릭스
또한 지윤의 고군분투는 예견돼 있던 것이기도 하다. 지윤이 영문학이라는 벽이 두터운 학과의 종신 교수를 넘어 학과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지윤이 아시아계 여성인 덕을 본 점도 있으니까. 백인 남성 위주의 고루한 학과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다양한 인종과 연령에게 열려 있는 젊은 학과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지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 어느 학생의 말마따나 학과나 강의에 여성이나 흑인 몇 명 끼워 넣는 것이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라마 속 학생들도, 보는 시청자들도, 그리고 지윤을 비롯한 교수진도 알고 있다.
지윤의 동료 교수 빌(제이 듀플라스)은 강의 중 나치 경례를 해 학생들의 거센 퇴출 요구에 휩싸인다. 학생들이 앞뒤 문맥과 당시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이런 사안에 다소 둔감하게 반응하는 기성세대 빌의 대처도 안이하기 짝이 없다. ‘더 체어’는 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과 발맞추지 못하는 기성세대 교수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진=넷플릭스
그러니 지윤은 (자신을 학과장에 올린) 장단에 맞추면서도 그 장단에 놀아나지만 말고 이용하려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마스코트 역할과 구조조정 해결사 역할을 동시에 맡길 종용하는 학장의 압박을 벗어나 야즈처럼 실력 있는 신진 교수와 지금은 인기가 없지만 영문학에 공로가 깊은 원로 교수 사이 융화를 꾀해 학과를 부흥해야 하는 학과장의 고군분투. 아직 정서적 교감 형성이 되지 않은 입양아 딸을 돌보면서 ‘썸남’ 빌과의 관계도 진전시키고 싶은 싱글맘의 고군분투. 기회만 되면 지윤(그리고 지윤을 비롯한 여성 또는 소수 유색인종)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의자를 빼앗아가려는 주류 남성 교수들과 어떻게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소수자의 고군분투. 1시즌 6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지윤의 삼중고가 펼쳐지는데, 코믹한 터치로 그려내기에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감상할 수 있다. 2시즌을 기대해볼 만하다.
다만 산드라 오가 연기하는 김지윤을, ‘그레이 아나토미’의 똑부러지는 크리스티나 양 같은 캐릭터로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더 체어’ 속 김지윤은 동료 교수의 말처럼 ‘착한 사람 놀이’(playing nice)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시즌이 제작된다면 김지윤이 모두에게 나이스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 홀랜드 테일러가 연기하는 조앤의 활약도 기대된다. 조앤과 지윤, 야즈라는 세대를 넘어선 여성들의 연대 또한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