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수술실 CCTV
조동찬 의학전문기자 dongcharn@sbs.co.kr
작성 2021.08.30 14:47 수정 2021.08.30 15:35
슬기로운 의사 생활과 외과계 의사 생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하 슬의생)의 배우 전미도 씨를 좋아한다. 커피 마실 시간조차 없을 것처럼 촘촘한 일과 속에 방 안에서 원두를 갈아 거름종이에 거품 내며 커피를 내리는 그를 보며 과거의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슬의생 작가에게 신경외과를 자문했던 전문의는 내 직속 후배이다. 그는 신경외과 영역만 자문했다고 했다. 아마 동료로 나오는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도 각각 전문의 자문을 따로 받은 것 같다. '생명에 직결되는 필수 의료'여서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일 수밖에 없음에도 의사로서의 사명감에만 호소하며 적어도 20년 넘게 사실상 방치해온 외과계 의사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저토록 멋들어진 '치료의 협주곡'을 연주해주고 있는 제작진들에게 고맙다.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대한신경외과학회(이사장 김우경), 대한외과학회(이사장 이우용),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이사장 김웅한), 대한산부인과학회(이사장 이필량) 대한비뇨의학회(회장 이상돈) 등의 지난 29일 급작스러운 만남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 모임을 통해 '수술실 CCTV 의무적 설치법 반대 보도자료'가 발표됐다.
CCTV 속 참 나쁜 의사들
2016년 당시 25세 아들(고 권대희)을 잃은 이나금 씨를 국회 앞에서 만났다. 작은 체구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지만 세상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의지는 10m 밖에서도 뿜어져 나왔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깨달았다. 우리 사회가 이 여성에게 큰 잘못을 했고 아직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가 보내준 고 권대희 씨의 수술실 CCTV를 보며 나는 경악했다.
성형외과 수술실 바닥에 피가 흥건합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지혈하려 애쓰고 대걸레로 바닥의 피를 닦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간호조무사. 의사는 없습니다.
환자는 과다출혈로 한시가 급한데, 간호조무사는 휴대전화를 보고 있습니다. 영상 속 환자 당시 25세 권대희 씨는 수술 49일 후 숨졌습니다.
다른 병원의 수술실 CCTV에는 의사 대신 의료기구 영업사원이 등장한다. 그 병원에서 수술받은 49세 남성은 주요 척추 신경이 손상돼 대소변을 못 가리고 현재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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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사건이 기사화되지 않았다면 제가 의사가 아닌 사람한테 수술받은 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언론에 공개된 수술실 CCTV 속 참 나쁜 의사를 보고 있노라면 수술실 CCTV 법안을 절대적으로 찬성하는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CCTV 법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vs "그런데, 조 기자님"
최근 의료계 원로 두 분과 점심식사를 했다. '4인 이하'의 남은 한 자리에는 처음 뵙는 외과계 전문의가 있었다. 첫 만남 이야기의 소재는 가벼워야 했고, 나는 드라마를 주제로 내놨다.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드라마를 좋아했다. TV는 물론 넷플릭스의 어지간한 드라마를 꿰차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수술실 CCTV로 화제가 전환됐다. CCTV 법안이 갖고 있는 부작용과 한계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나는 의료계가 받아들여야 할 사안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는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조 기자님, 저요, 드라마 끊었습니다. 드라마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밤늦게까지 보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어느 날 아침에 수술실 들어가는데, 환자의 수술 계획과 드라마 장면이 겹치더라고요. 그래서 끊었습니다."
외과계 의사들은 수술 전 미리 머릿속으로 수술을 해본다. 수술 전날까지 수십 번 했을지라도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에 반드시 또 하는데, 그때 전날 밤 보았던 드라마 장면이 방해를 했던 것 같다. 그는 수술실 CCTV가 수술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슬의생에서 신경외과 자문을 했던 의국 후배 교수도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 그가 전공의 2년 차일 때 나는 전임의 과정을 함께 했는데, 그때 그는 화장실을 참 자주 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습관이 좋았다. 그는 위험도가 높은 뇌종양, 뇌출혈 환자의 수술을 앞뒀을 때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으니까. 생명이 걸린 수술에 참여하는 의사는, 전문의든 전공의든, 공통된 마음가짐이 딱 하나 있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환자를 꼭 살려야겠다'는 닭살 돋는 문장이 아니다. 환자는 의사가 살리는 게 아니라 단지 환자가 스스로 회복하는 걸 돕는 것뿐이라는 건 전공의 시절 현장에서 직감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참여한 수술에서 단 1도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털끝만 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긴장감이 좋아하던 드라마를 끊게 하고, 수술 전에 화장실을 자주 드나드는 우스꽝스러운 습관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수술실 CCTV 법안을 걱정하고 있다.
국민의 준엄한 경고
참 나쁜 의사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한 환자들이 만들고 있는 수술실 CCTV 설치법, 역설적이게도 참 좋은 의사들의 걱정이 커졌다. 의료계에서는 나쁜 의사들이 먼저 CCTV 설치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25세 청년을 사망하게 하고, 49세 장년을 대소변 가리지 못하게 만든 병원은 모두 수술실 CCTV를 설치했었다. 그럼에도 참 나쁜 의사를 스스로 정화하지 못한 의료계의 자업자득이라는 국민의 준엄한 경고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의료계가 먼저 의료 과실 은폐와 대리수술에 대해 피해자와 국민께 충분히 사과하고, 국민은 의료계를 다시 믿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은 '슬의생'같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외과계 의사들이 'CCTV가 있으니, 살살 하자'고 마음을 고쳐 먹는 장면은 드라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447284&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