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혼자서도 잘 살고 있나요?
▲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컷 1 편의점 도시락으로 혼자 끼니를 때우고 있는 무표정한 진아 ⓒ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나는 혼자서도 잘 산다.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고 혼자 잠을 자는 게 편하고 익숙하다. 이젠 가족들이 있는 본가보다, 7평짜리 자취집이 편해졌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도 좋지만, 혼자 간단하게 시켜먹는 배달음식도 나쁘지 않다.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것보다, 좋아하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혼자 주말을 보내는 게 익숙하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는 영화의 포스터는 단번에 내 시선을 끌었다. 침대 위에서 먹는 편의점 도시락, 텅 빈 시선으로 보고 있는 티브이, 생수통 그대로 마시는 물. 이건 분명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다.
혼자 있고 싶다면서, 혼자 있지 못하는 이유
주인공인 진아(공승연)는 늘 혼자다. 혼자인 그녀의 삶은 무미건조하지만, 그 무미건조함이 그녀를 평화롭게 한다. 그는 이웃주민과도, 직장동료와도 눈 맞추지 않는다. 점심에 찾아가는 식당도 주문과 계산을 모두 키오스크가 해주고 1인석이 준비된 '혼밥'에 특화된 곳이다.
하지만 진아는 단 한순간도 오롯이 혼자인 적이 없다. 출퇴근 길에는 핸드폰 영상 속 사람들과 함께, 회사에서는 전화기 너머의 고객들과 함께다. 식당에서는 먹방을 하고 있는 유튜버와 함께 밥을 먹고, 집에서는 티브이 속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들과 함께다.
진아처럼 나도,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오롯하게 혼자 있지 못한다. 집 밖에선 습관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꼽고, 집 안에서는 항상 티브이나 라디오를 틀어둔다. 잠자리에 들 때조차 '잘 때 듣는 asmr' 같은 영상을 틀어두고 잔다. 핸드폰이나 티브이 없이 오롯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라고 하면 과연 나는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우리는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 다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타인, 언제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꺼버릴 수 있는 관계면 충분하다.
통제할 수 없는 타인, '진짜' 관계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혼자 사는 집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지극히 안전한 공간이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내 귀를 이어폰으로 막고, 내 눈을 영상으로 가둔다. 하지만 변수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컷 아무렇지 않게 경계를 넘나드는 수진이 진아는 영 불편하다 ⓒ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진아에게 변수는 신입사원 수진(정다은)이었다. 언뜻 봐도 두 사람의 mbti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 보인다. 견고히 세워둔 진아의 벽을 수진은 아무 생각 없이 침범한다. 영상 속 인물이 그렇게 귀찮게 군다면 바로 영상을 끄고 차단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현실 속 인물인 수진은 그럴 수가 없다.
전화기 너머의 진상 고객이 다짜고짜 욕을 하면 매뉴얼대로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를 말하면 그만일 텐데, 수진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정신이상자인 고객이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매뉴얼대로 "아, 그러셨어요"라고 대충 받아주면 될 일인데, 수진은 진심으로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다.
수진은 타인과 맺는 '진짜' 관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 "잘 가요"
어떤 고객을 대하든 상담 매뉴얼대로만 대응하며 매달 우수사원으로 뽑히는 진아와 달리, 수진은 상담원 일을 1주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 성가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마음에 수진의 공간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진아는 수진이 없어진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외로움과 공허함을 마주한다.
외로움의 해답은 혼자가 아닌 둘이 되는 것.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답은 관계 맺음이 아닌 이별이었다. "제대로 된 이별"
진아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했다.
"난 수진 씨한테, 제대로 된 작별 인사가 하고 싶어요.
수진 씨,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작별인사 뒤에 진아는 방의 커튼을 걷어낸다. 하루 종일 틀어 둔 티브이 전원을 끄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서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 대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이 장면들은 비로소 진아가 온전히 혼자 사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아가 여전히 혼자여서, 관계의 부재의 해답이 맺음이 아닌 이별이어서 이 영화가 더 좋았다.
진짜 내가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나의 지난 이별들을 떠올려보자. 이별이 아프다는 이유로 회피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 거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