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한국 영화, 기둥이 무너진다
사진 / 코로나 확진자 증가와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인 9일 오후, 서울 용산의 한 영화관에 관객이 없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0.12.9. / 고운호 기자
한국 영화계라는 텐트를 떠받치던 든든한 기둥이 넘어질 판이다. 한 해 극장가에서 최대 성수기로 꼽히는 대목이 여름이다. 그래서 흔히 7~8월에 상영하는 한국 대작 영화들을 ‘텐트 폴(tent pole)’이라고 부른다. 안정적인 흥행으로 다른 작품의 손실까지 메우는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텐트 기둥이라는 뜻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 한국 영화 산업의 규모는 2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코로나 발생 첫해였던 지난해 성적과 단순 비교해도 올해 상황은 암울하다. 확진자 숫자가 가파르게 증가했던 지난해 7~8월에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435만명) ‘반도’(381만명)’ 같은 대작들은 비교적 선전했다. 반면 올해 여름 성적은 여기에도 크게 못 미친다. 아직 개봉 중이기 때문에 최종 성적을 예단하기는 힘들지만 ‘모가디슈’(23일 현재 278만명) ‘싱크홀’(165만명) 등 거의 반 토막에 가까운 수준이다. ‘천만 영화’가 실종된 지는 오래됐고, 요즘엔 여름 개봉작을 모두 합쳐도 ‘천만 관객’이 안 된다.
단순 비교 이면의 속사정은 훨씬 심각하다. 극장의 좌석 판매율에도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까지 흥행작의 좌석 판매율은 30%에 이르렀다. 극장에 가면 10석 가운데 3석에는 손님이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지난해부터 인기작의 좌석 판매율도 10%대로 떨어졌다. 영화를 공장에 비유하면 공장 가동률은 그대로인데 제품 판매량이 급감한 셈이다. 극장에서 한 번 틀었을 때 평균 관객이 너덧 명에 불과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영화관이 비디오방으로 전락했다는 장탄식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올해 영화 산업이 지난해보다 악화된 요인이 또 하나 있다. 올해 복합 상영관(멀티플렉스)들은 극장가를 살리기 위해 ‘모가디슈’(제작비 250억원)와 ‘싱크홀’(140억원) 등 한국 영화 두 편에 대해서 제작비의 절반은 보장해주기로 했다. 설령 망하더라도 들어간 투자금의 절반은 무조건 돌려주는 파격적 지원책이다. 한국 영화의 ‘인위적 경기 부양책’이라고 할까. 만약 자체 출혈을 감수하고 지원했는데도 매출이 급전직하(急轉直下)한다면 그 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금 한국 영화계가 바로 그렇다.
산업적 관점에서 한국 영화 발전의 결정적 분기점을 꼽으라면 두 가지 사건을 든다. 1998년 서울 테크노마트의 CGV 1호점 개관과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가동이다. 그때부터 실시간 통계를 통해서 합리적 예측과 전망이 가능해졌고 극장 매출도 더불어 급증했다. 박찬욱·봉준호 같은 거장들이 세계 무대에서 나래를 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멀티플렉스와 통합전산망은 한국 영화계의 든든한 인프라스트럭처(기반 시설)와도 같았다.
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영상 서비스의 등장과 코로나 사태라는 이중고 속에서 한국 영화계는 또 한번의 자체 혁신과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다. 넷플릭스가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건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든 관람 가능한 ‘손바닥 안의 영화관’이기 때문이다.
극장의 대형 화면을 선호하던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감독들은 물론, 디즈니·워너브러더스 같은 할리우드 영화사들마저 온라인 서비스와 오프라인 극장의 공존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영화계는 애써 무시하거나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자칫 넷플릭스·디즈니 같은 해외 강자들의 콘텐츠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 한국 영화 산업에 절실한 건 단기적 지원책이 아니라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고속도로’다. 그래야 차세대 박찬욱과 봉준호도 그 도로를 타고 신나게 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