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1 12:00
호수 1662
인기 영화배우 황정민이 납치됐다. 이는 《인질》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이다. 납치범들의 조건은 20시간 안에 거액의 돈을 달라는 것.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황정민은 초조하다. 인질범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가, 다른 방안을 짜낼 것인가. 극 중 납치 사건과 실제 배우 황정민의 캐릭터가 절묘한 방식으로 뒤섞인 이 작품은 영화와 실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색다른 재미를 추구한다. 제작사 외유내강이 《모가디슈》에 이어 선보이는 올여름 텐트폴 영화로 《엑시트》(2019)의 이상근, 《시동》(2019)의 최정열 감독과 더불어 외유내강이 세 번째로 선택한 신인감독 필감성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황정민은 이 영화에 주연뿐 아니라 기획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황정민이기에 가능한 것들
《인질》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본론으로 진입한다. 황정민은 신작 《냉혈한》(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은 아님)의 제작발표회와 뒤풀이에 참석한 뒤 홀로 귀가하던 중 집 앞에서 의문의 사내들에게 납치당한다. 이후에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94분이라는 간결한 러닝타임 역시 영화가 목표한 바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인질범들의 아지트로 붙잡혀간 뒤 황정민은 결박된 상태로 내내 그곳에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세팅은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연극에 가깝다. 차이점이 있다면 카메라의 역동성이다. 인물에 밀착하듯 움직이는 카메라는 고정되는 순간이 거의 없이 긴박한 공기를 담아낸다.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실제 배우 황정민의 면모를 캐릭터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황정민은 그 자신과 같은 이름, 같은 직업의 인물을 연기한다. 아직까지 회자되는 그의 유명한 ‘밥상 소감’ 영상으로 문을 여는 영화는 황정민 본연의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것임을 표방하듯 보여준다. 이는 《인질》의 모티프로 알려진 영화 《세이빙 미스터 우》(2015)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중국에서 일어난 배우 납치 사건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는 유덕화가 납치된 인기 배우를 연기한다. 다만 그가 연기하는 것은 ‘우’라는 캐릭터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인질》이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반해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뒤섞은 비선형적 플롯을 가진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실제 배우가 납치됐다는 몰입감은 《인질》의 중요 요소다. 이것이 이야기에 개성을 더한다. 즉 이 영화는 애초에 누구나 알 만한 스타성을 갖추고, 누구나 기억할 만한 작품에 출연한 배우로부터 출발하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황정민은 유행어로 기억되는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특정 대목마다 관객들이 모두 알고 있는 그의 출연작과 유행어가 등장할 때, 영화는 순간순간 도발적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가진다. 인질범 중 한 명은 황정민의 팬이라며 “드루와(들어와), 드루와. 그거 한 번만 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이 유행어를 탄생시켰던 영화 《신세계》(2013)에서 황정민과 공연했던 배우 박성웅이 특별출연하며 재미를 더한다.
물론 유행어를 가진 다른 배우가 출연해도 《인질》의 세계관이 유지됐겠지만, 지금껏 누군가를 추적하고 사건을 풀어가는 역할을 주로 맡았던 황정민의 이미지를 역으로 뒤집은 데서 오는 쾌감만큼은 재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세계》의 정청을 비롯해 《베테랑》(2015)의 형사, 《검사외전》(2015)의 검사,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나는 《히말라야》(2015)의 산악인 엄홍길, 《곡성》(2016)의 무당 일광 등 그간 황정민이 연기해온 인물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실제와 픽션을 넘나드는 설정, 양날의 검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가 인질로 잡혔다’는 설정을 활용한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극 중에서 황정민은 그간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의 이름을 활용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붙잡혀 있다는 힌트를 남기는가 하면, 인질범들을 속일 만한 연기력과 심리전을 발휘해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연기력이 남다른 인질과 잔혹하고 지능적인 인질범의 대결. 《인질》이 추구하는 스릴과 재미다. 스마트폰 메신저 플랫폼 카카오톡에서 진행해 개봉 전 화제를 모았던 채팅 이벤트 ‘구해줘! 황정민’도 이 같은 점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이용자가 극 중 황정민과 1대1 채팅을 나누며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게임이다. 오픈 첫날 4만 명이 동시 접속해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관심을 끈 이벤트다.
실제로 《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극 중 황정민의 상황과 관객의 감정이 강력하게 연결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관객의 몰입을 위해 몇 가지 설계를 집어넣었다. 하나는 주인공이 애초에 붙잡혀 있기에 기대되지 않았던 액션의 쾌감을 선사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황정민을 제외한 나머지 배역은 모두 신인 배우들을 캐스팅했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얼굴을 소개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선택이기도 하다. 얼굴은 조금 낯설지만 각각 개성 있는 매력을 보여주는 인질범 5인방, 황정민보다 앞서 붙잡혀온 또 다른 인질 소연(이유미)의 캐릭터 역시 극에 적절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장점이 《인질》이 품은 검의 양날이라는 점이다. 황정민이 납치됐다는 설정은 리얼리티를 배가하는 장치지만, 동시에 몰입에 방해가 되는 점이기도 하다. 황정민은 영화에서 극 중 역할로서도 존재하지만 배우 그 자신으로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배우가 납치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부터 생각하는 관객이 있다면 애초에 몰입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배우가 픽션과 실제를 슬쩍 넘나들며 그 스스로를 풍자하는 코미디 장르가 아니라 쫄깃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스릴러 장르가 아닌가. 《인질》은 애초에 황정민이 아니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신선한 시도인 동시에 그 시작점이 태생적 한계가 되기도 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극 중 상황에 몰입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그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확연하게 갈릴 것이다.
작품 안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 배우들
배우가 자기 자신을 연기한 작품은 《인질》이 처음은 아니다. 이 시도는 국내외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져왔다. 가장 가까운 개봉작으로는 1월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차인표》가 있다. ‘왕년의 슈퍼스타’ 차인표가 예상치 못한 붕괴 사고로 갇히게 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가뜨리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이야기다. 문소리는 《여배우는 오늘도》(2017)에서 배우 문소리를 연기했다. 극 중 모습과 실제 문소리를 느슨하게 연결해 배우로서의 고민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이 작품에는 문소리의 실제 남편인 장준환 감독이 등장하기도 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역시 대표적인 작품이다. 꼭두각시 인형 예술가로 일하는 주인공이 특정 문을 통해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의 영화다. 에반 골드버그, 세스 로건이 공동 연출을 맡은 코미디 SF 《디스 이즈 디 엔드》(2013)는 조나 힐, 제임스 프랭코, 세스 로건 등 출연진 전체가 자기 자신을 연기한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