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도 원하는 배리어프리 서비스
[Cover Story] OTT 업계에 부는 ‘배리어프리’ 열풍
“대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도 꼭 자막을 켜고 봐요. 대사가 100% 전달되니까 몰입도 더 잘되는 거 같고요. 이젠 자막 없이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영 어색해요.”
직장인 이나리(28)씨는 국내 드라마와 오락 예능을 볼 때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제공서비스·Over The Top) 플랫폼인 ‘넷플릭스’를 주로 이용한다. 넷플릭스에서 제공하지 않는 한국 콘텐츠를 챙겨 보기 위해 국내 OTT인 ‘티빙’ 계정도 가입했다. 하지만 두 플랫폼에서 모두 제공하는 콘텐츠라면 자막이 있는 쪽을 선택한다. 이씨는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 시즌2’는 두 플랫폼에서 모두 볼 수 있는데 영상과 한국어 자막이 함께 제공되는 넷플릭스로 보고 있다”고 했다. 자막을 얻는 대신 본방 사수는 포기했다. 자막 서비스는 아무리 빨라도 방송 종료 후 2~3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배리어프리 서비스, 장애인·비장애인 모두 원한다
OTT 플랫폼 선택 기준으로 ‘폐쇄형 자막(CC·Closed Caption)’이 떠오르고 있다. 흔히 외화나 해외 드라마의 외국어 대사를 번역하는 일반적 자막이 아니다. 국내 콘텐츠에 나오는 우리말을 한글로 옮긴 이른바 ‘배리어프리(barrier-free) 서비스’다. 청각장애인이 영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지만, 최근 비장애인들도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폐쇄형 자막은 말소리만 옮기는 일반적 자막과 영상에 담긴 모든 소리를 담는다. 이를테면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 한숨 짓는 소리, 점점 커지는 발걸음 소리 등 음성 외의 소리까지 표현한다.
국내 OTT 시장의 성장세에 비해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원활하게 제공되는 편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한국의 OTT 시장 규모는 10년 새 약 10배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2년 1085억원 수준이던 국내 OTT 시장은 2016년 3089억원으로 확대됐고, 지난해에는 7801억원까지 커졌다. 올해는 1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배리어프리 서비스에서 가장 앞선 곳은 글로벌 OTT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자체 제작하는 오리지널 작품에 기본적으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폐쇄형 자막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을 제공한다. 또 시각장애인이 외국 콘텐츠를 접할 수 있도록 ‘TTS(텍스트 음성 변환 기술·Text to speech)’도 지원한다. TTS는 PC나 모바일, 태블릿 등에서 화면의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해서 들려주는 기능이다. 안드로이드나 iOS 등 운영체제에서 약 40가지 언어로 지원하는데, OTT와 TTS가 호환돼야 제대로 작동한다.
국내 OTT 사업자들도 장애인 영상 접근성 확보에 나서는 모양새다. 왓챠는 지난달 27일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고, 한국 콘텐츠 126편에 폐쇄형 자막을 적용했다. 왓챠는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13일 기준으로 영화 153편, 드라마 3편에 폐쇄형 자막을 지원하고 있다. 티빙과 웨이브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중심으로 서비스를 늘릴 계획이다. 네이버 시리즈온은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한글 자막과 음성 화면 해설이 동시에 제공되는 ‘가치봄 영화’를 서비스하고 있다. 현재 ‘가치봄 영화관’에 등록된 작품은 총 338점이다. 하지만 같은 작품이라도 ‘7일 대여’와 ‘평생 소장’으로 중복 등록된 콘텐츠 125점을 제외하면 213점이 서비스되고 있다. OTT 업계 관계자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제작사들이 작품을 특정 플랫폼에만 제공했는데 최근 들어 한 콘텐츠가 여러 OTT에 제공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한 영화가 여러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것처럼 되다 보니 자막이나 음성 해설처럼 단순 영상 제공을 넘어선 서비스가 중요해진 것”이라고 했다.
美·英 배리어프리 의무화… 국내서도 법안 발의
시각·청각 장애인에게 배리어프리 서비스는 숙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장애인은 지난해 기준 총 263만3026명이다. 이 가운데 청각장애인은 39만5789명(15.0%), 시각장애인은 25만2324명(9.5%)으로 총 64만8113명(24.6%)에 이른다.
청각장애인 엄마가 아기를 키우며 겪는 일을 책 ‘너의 목소리가 보일 때까지’로 펴낸 이샛별 작가는 “OTT에서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하지 않으면 시청각장애인은 최신 개봉작을 관람할 수 없다”면서 “배리어프리 버전의 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2~3개월 정도 자막과 화면 해설 삽입 작업을 하고 검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늦게 관람하는 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이어 “자막 제공이 안 되는 영상 콘텐츠를 보면서 ‘이 사람이 왜 화냈을까?’하고 가족에게 물어보면, 일일이 저에게 설명해주기엔 영상이 금방금방 지나가버린다”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가족이 함께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서비스가 의무화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OTT에서 배리어프리 서비스 제공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계류 중이다. 지난달 22일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OTT 사업자가 한국 수어, 화면 해설, 폐쇄형 자막을 제공하도록 노력할 의무를 명시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외 주요국에서는 이미 OTT에 장애인 접근권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이미 시행 중이다.미국과 영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2010년 10월 장애인을 위한 방송법인 ‘21세기 통신 및 비디오 접근성 법(CVAA)’을 마련했다. CVAA는 시청각장애인에게 폐쇄형 자막을 필수적으로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는 폐쇄형 자막의 품질에 대한 규정까지 마련해 영상 콘텐츠에 적용하고 있다. 이를 위반 시 최소 10만달러에서 최대 100만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계기는 2011년 6월 미국청각장애인협회(NDA)가 넷플릭스에 제기한 소송이다. 당시 NDA는 장애인을 위한 폐쇄형 자막이 거의 없고 해당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NDA 손을 들어줬다. 이후 OTT 사업자를 상대로 한 장애인 단체의 연이은 소송으로 이어졌고 OTT 사업자들도 적극적으로 서비스 제작에 나서게 됐다.
영국은 2003년 영상 콘텐츠에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일정 비율 이상 적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커뮤니케이션법 2003’을 법제화했고, 2010년 관련 법을 개정하면서 OTT로 범위를 확대했다. 영국의 OTT 사업자는 전체 콘텐츠의 80%에 자막을 제공해야 하고, 음성 해설은 10%, 수어 서비스는 5%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방송 통신 규제 기구 오프콤(OFCOM)에서는 매년 OTT 사업자에게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추진 실적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동일 콘텐츠에 플랫폼마다 자막 만들어야… 비효율은 숙제
국내 OTT 업계에서도 배리어프리 서비스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는 입장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다. 업계 관계자는 “자막 제작비는 콘텐츠 내용과 분량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대개 영상 1분당 3000~1만원 수준”이라며 “음성 해설은 자막 제작비의 10배 이상이 든다”고 설명했다.
작품 한 편을 90분으로 가정하고 최저 비용으로 계산해도 27만원이 든다. 이를 9만편 이상의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왓챠에 적용해보면, 자막 제작에만 약 243억원이 필요하다. 특히 콘텐츠별로 각 OTT 사업자가 자막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을 각자 부담해야 한다는 비효율 문제도 발생한다.
저작권 문제도 업계의 고민이다. OTT는 유통 플랫폼이기 때문에 자막이나 음성 해설을 제작하려면 원제작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콘텐츠 계약 시 자막 제작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비용도 OTT에서 부담하지만 원저작자 측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일 때가 많다”면서 “OTT에서 자막을 만들 때 오류가 발생하거나 영상의 본취지와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라고 했다. 이어 “배리어프리 서비스가 필요하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자와 유통하는 OTT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애인 인권단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의 김철환 활동가는 “배리어프리 서비스는 기본권의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서비스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면서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장애인·비장애인 구분 없이 많은 OTT 사용자가 원하는 것처럼 장애인의 접근성 이슈를 모두의 문제로 인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