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들이 그려서 가능했다…자폐소년의 데이트 도전기 '별나도 괜찮아'
‘자폐’는 종종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쓰인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거나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에 서투르다는 자폐의 특성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자폐는 주위에서 자주 접하기 어려운 질환이기 때문에 이런 콘텐츠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잘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이 자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자폐를 다룬 콘텐츠가 순기능을 하려면 ‘당사자’가 필수적이다. 전문가 조언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실제와의 간극이 생긴다. 그런 측면에서 자폐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별나도 괜찮아>(원제 Atypical)는 제작 과정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달 네 번째 시즌을 마지막으로 끝났는데, 자폐인들이 제작 과정에 다방면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촘촘한 이해를 돕는 드라마가 탄생했다.
<별나도 괜찮아>는 고기능 자폐 장애를 가진 고등학생 소년 샘 가드너가 여자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드라마는 샘의 시각으로 자폐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돕는다. 무겁지 않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자폐인들이 어떨 때 특정 행동을 하는지, 비자폐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지 차분하게 보여준다. 대놓고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가 아니지만, 보다 보면 자폐에 관한 이해가 쌓인다.
이게 가능한 건 실제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이 드라마에 참여한 덕분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2017년 시즌 1이 방영됐을 때 <별나도 괜찮아>는 당사자 참여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시즌 1에 참여한 자폐인 배우는 샘의 친구로 등장한 앤서니 자크 한 명이었다. 비판이 이어지자 제작진은 샘 역할에 자폐인 배우를 기용할 생각으로 오디션을 열었다는 해명도 내놨다. 하지만 당사자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샘 역할이 ‘반복행동’ 같은 극히 제한적인 자폐 행동특성을 차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이 지적을 수용한 제작진은 시즌 2부터는 자폐인 배우 8명을 합류시켰다. ‘미러클 프로젝트’ 소속 배우들로, 샘의 친구들을 연기했다. 미러클 프로젝트는 자폐인들에게 연극·영화·미술심리상담 등 활동을 지원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계맺기·의사소통 능력 계발을 돕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비영리단체다. 출연 배우들은 현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드라마가 자폐의 실제를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냈다며 만족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사랑’을 찾아나선다는 설정이 소중하다. 사람들은 자폐 자체도 생소하게 여기는데, 자폐인들의 사랑은 더욱 모른다. 샘은 “우리가 공감을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일단 이해하고 나면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고 말한다. 당연하지만 이들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자폐인의 사랑을 다루면서 당사자 참여가 극대화된 콘텐츠도 있다. 실제 자폐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러브 온 더 스펙트럼>(원제 Love on the spectrum)이다. 이 호주 다큐멘터리에서는 자폐인들의 ‘소개팅’ 장면부터 이미 약혼한 커플, 동성 연인의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제작환경은 어떨까.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게 현실이다. 영화 <말아톤>과 드라마 <굿 닥터> <사이코지만 괜찮아> <무브 투 헤븐> 등이 자폐를 소재로 한 국내 콘텐츠다. 아직까지 당사자가 제작 과정에 참여한 것은 알려진 바 없다. 자폐인을 객체로 다룬 다큐멘터리는 많지만 <러브 온 더 스펙트럼>처럼 삶의 주체로 그려낸 건 찾기 어렵다. 자폐 당사자와 장애인 인권단체들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말아톤> 출연 배우 조승우에게 한 기자가 ‘자폐아 포즈를 취해보라’고 해 그가 몹시 화를 냈다던 2005년보다는 분명히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당사자성’ 반영은 우선순위가 아니고 그러다 보니 자폐증의 특정한 행동특성이 과도하게, 선택적으로 반영된다. 배우들에게는 ‘연기 도전’ 정도로 여겨진다. 관련 전문가에게 자문하거나, 제작진의 가족·지인 중 자폐인이 있는 경우 참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장애인 인권단체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의 김철환 활동가는 국내 콘텐츠들의 전문성과 당사자 참여는 아쉬운 수준이라고 했다. 또 제작자의 의지에 따라 결과물의 질이 “들쭉날쭉하다”며 장애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 때는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따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활동가는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대는 건 한계가 있다”며 “(국내에서는) 장애를 비하할 여지를 준 콘텐츠들이 많았는데, 제작 가이드라인을 시스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방송사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한 가이드라인을 갖췄지만, 이는 타의적으로 마련한 기준에 불과하다”고 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 운동’을 벌이는 ‘피플퍼스트’의 이현주 팀장은 자폐 콘텐츠에 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당사자 A씨는 “소리 지르기, 발로 차기, 때리기 등 자폐인의 특정 행동만 부각되는 점은 틀렸다”고 했고, 또 다른 당사자 B씨는 “기억력이 비범하고 지능이 높은 고기능 자폐가 많이 등장하는 한편 지적장애인은 바보로 많이 그려지는데, 그런 프레임이 생길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당사자성 반영에서 앞선 외국 콘텐츠는 자폐 증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는 것처럼 보인다”며 “발달장애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데도, 아직 (제작자들이) 자문한 경우나 내용 확인을 요청한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한데, 제작자들이 주변의 특정 사례만 참고한다면 자폐인을 그린 것이 아닌 ‘특정인’을 따라 한 콘텐츠가 되고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