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이국적인 하위문화 아닌 학문적 가치 인정받으며 한국문화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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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세요. 딴 거 하세요.” Y 교수는 단호했다. 그의 말에 마음이 동요했다. 2003년 겨울, 나는 프랑스어를 배운 지 5년이 됐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에서 한국학 교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대학의 중국어과 및 일본어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담당하던 Y 교수는 당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다른 길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200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가 한류의 꿈을 꾸기 시작한 시기였다. [가을동화]나 [겨울연가], 그리고 [대장금]으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에 매혹돼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점차 늘어나자 우리 사회는 흥분했다. 소위 ‘국뽕’을 맞으며 희열을 느끼던 사회 분위기에 휩싸여 희망에 차 있던 내게 Y 교수의 말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 Y 교수가 강의하던 학교에 한국어과가 1988년 설치됐다가 10여 년 후에는 입학하려는 학생이 없어 결국 학과가 폐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실제로 서유럽의 중심국가인 프랑스에서 한국의 인지도는 바닥이었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 둘 중 어디가 공산주의 국가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이제 더는 한국 언론은 케이팝 파리 콘서트가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덕에 그 기간이 연장됐다는 소식에 고무되지 않고, ‘무한도전’에 방영된 파리 샤를드골 공항 직원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에 흥분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은 굳이 환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영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좀처럼 지지 않을 것만 같던 국내 한국어 교육의 태양은 조금씩 지고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 유학생 유입이 눈에 띄게 줄면서 몇몇 정규직 강사 외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는 소식이 몇 다리를 건너 들려오고 있다.
한국어과 경쟁률 ‘28대 1’, 기념비적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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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 Y 교수는 폐지됐던 학과가 부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학과가 신설되려면 엄청난 정치력과 재정이 필요하다. 폐지됐던 학과가 다시 설치되려면 앞의 조건에 더해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견고한 당위성이 요구된다. 신설보다 부활이 훨씬 어렵다. 그런데 프랑스 내 한국어 및 한국학에 대한 열망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현실로 가져왔다.
오늘, 프랑스 내 한국어 및 한국학 교육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5년 한국어가 프랑스 의무교육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인정받은 이래, 총 17개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 정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등교육, 즉 대학 교육에서는 그 변화가 보다 뚜렷하다. 주불한국 교육원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총 22개 대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이 운영되고 있고, 관련 학과가 설치된 학교는 총 7개교이다. 그중 두 학교에는 한국어와 한국 역사, 사회, 인류학, 문학, 예술 등을 종합적이고 심도 있게 다루는 한국학과가 설치돼 있고, 나머지 다섯 개 학교에는 응용외국어학과 한국어 전공이 설치돼 있다.
이들 학과에는 201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입학 정원의 10배가 넘는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지원하더니, 3년이 지난 올해는 평균 경쟁률 19.4대 1을 기록했다. 그동안 입학 정원이 늘었음을 고려하면 두 배가 넘는 증가세다. 40명을 뽑는 보르도대학교 한국어과에는 1117명이 몰려 경쟁률 28대1이라는 기념비적인 수치를 달성했다. 이것은 그저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한 프랑스 젊은이들의 관심이 그저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고 팬덤을 형성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국 언어와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지식을 쌓아 미래를 설계하고자 계획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한국학과 및 한국어과에 지원하는 학생 수의 증가는 다른 발전을 불렀다. 입학 정원도 매년 조금씩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에 맞춰 처음에는 계약직 강사의 수가 늘더니 이윽고 부교수와 정교수로 이루어진 전임교원 수도 늘었다. 프랑스에서 계약직 강사는 특별한 예외 상황이 아닌 이상 한 학교에서 6년 이상 근무할 수 없다. 보수도 호봉에 따라 올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전임교원은 다르다. 프랑스의 고등교육 공무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년이 보장되며, 이들의 호봉은 계속해서 올라간다. 전임교원을 한 명 채용하려면 그만큼 프랑스 교육 당국은 장기적인 재정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2021년 5월 현재, 프랑스 전역의 한국학 및 한국어 분야 전임교원은 총 28명이다. 9월이 되면 30명이 될 예정이다. 참고로 프랑스 내 한국학 전임교원은 1990년 8명, 2002년 13명에 불과했다.
한국 관련학과 전임교원·지망생 수준도 ‘업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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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이 다양해지자 커리큘럼도 그에 발맞추어 세분되고 풍성해졌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파리대학교와 국립동양어문화대학교 한국학과의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전공 설치다. 프랑스 의무교육에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 지위로 승격된 것은 2015년이지만, 한국의 임용고시에 해당하는 CAPES에는 아직 한국어가 없다. 현재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한국어 수업 담당자들은 수년 전부터 프랑스 내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위해 물심양면 애써 온 우리 교민들로,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발굴됐다. 프랑스 대학 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전공 설치는 프랑스의 고등교육계가 한국어 CAPES가 곧 설치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전공에 사람이 몰리면서 입학생 선발 기준도 엄격해졌다. 고등학교 성적과 한국의 수능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 성적은 당연히 높아야 하고, 외국어 실력 및 인문학적 소양이 갖춰진 학생들만 한국학과의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있게 됐다. 즉, 보다 잠재력 있고 목표가 뚜렷한 학생들이 한국학과 한국어를 공부하게 됐다.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이 높아지면서 강의 수준도 올라갔다. 필자는 파리 내 한 대학의 한국학과에서 학부 3년, 석사과정 2년을 거친 학생들이 굉장한 수준의 글을 한국어로 써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음을 목격한 바 있다. 그 놀라움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프랑스 국립동양어문화대학교 한국학 석사 2학년 마리 안 후아제(Marie-Ann Hoizé) 학생이 2020년 말, 한국어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가정 주부에서 독립적인 여성으로?
1950년대부터 2020년까지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많이 변화해 왔다. 예전의 한국 여성은 단순히 결혼을 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의무였다. 남편 없이 사는 여성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라 부도덕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결혼을 하게 되면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은 가정을 보호하며 희생하는 역할이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경우, 자식의 교육을 맡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가정 내에서 생긴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나 자식의 교육은 모두 다 여성이 할 일이었다. (후략)
프랑스 내 한국학 연구의 질과 양도 괄목할 발전을 거두고 있다. 프랑스의 박사논문 아카이브(these.fr)에 따르면 1985년 이후 프랑스에서 발표된 박사논문 중 ‘한국’을 키워드로 하는 것은 총 942편,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460편이 2010년 이후에 나왔다. 또한 2000년대 이전까지는 중국학이나 일본학 전공자가 우연히 한반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한국학자로 변모하는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면, 현재는 처음부터 한국에 지대한 애정과 학문적 관심을 갖고 한국학을 전공해 박사가 되고 연구자, 교수가 되고 있다. 기존 연구자들이 근대 이전 시기에 집중한 것과 달리 후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석사과정생들은 현대 남한과 북한 사회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류에 매료된 프랑스 청소년 100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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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전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전에 없이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밟기를 희망하는 한국 관련 전공 학부생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직도 프랑스에서 한국 대학의 학위는 크게 의미가 없다. 학부를 마친 한국 유학생이 프랑스 대학에서 석사 과정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경우, 대개는 학부 2학년 혹은 3학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석사 학위가 있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바로 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석사 2학년으로 입학 허가를 받게 된다. 즉,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 계획이 있는 프랑스 학생이 한국에서 유학하는 것은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프랑스 대학과 달리,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어마무시하다. 그런데도 한국에 매료된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모험을 강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변화를 끌어내는 원동력, 즉 프랑스 청소년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 증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직관적으로는 한국의 대중가요, 드라마, 영화, 뷰티 산업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한국 기업들의 성과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나는 2015년 이후로 프랑스의 여러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학생들과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계기에 대해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눈 바 있다. 절대다수는 한국의 문화와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접하게 된 시기였노라고 고백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한 계기로 한국의 스타 혹은 문화콘텐트의 팬이 되고, 인터넷 매체를 통해 한국어를 독학하는 단계에 다다르면, 그때부터 진지하게 한국학을 전공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학 혹은 한국어를 전공하고자 하기로 마음먹는 단계에 이른 프랑스의 청소년들은 이제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비교적 폭넓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부모님 세대에 있어 한국은 여전히 낯선 미지의 영역이다. 시민들의 시위에 경찰이 동원되고 공권력의 폭력이 표출될 때 정도에야 한반도의 북부, 즉 북한이 비교 대상으로 소환될 뿐이다. 소위 ‘그거 공부해서 나중에 뭐가 될래? 뭐 먹고 살래?’와 같은 가족의 압박을 설득 혹은 고집으로 이겨낸 고등학생들은 이제 대학 입시에서 한국 관련 학과에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내 한국에 대한 관심은 특정 세대 안에서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화를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이 명확하게 구분되므로, 이는 하위문화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하위문화 중에서도 세대 문화 혹은 청소년 문화에 속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청소년들이 공유하던 한국의 대중문화는 2010년대 들어 프랑스 내 인터넷망의 광범위한 설치와 소셜네트워크의 일상화와 함께 보다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와 같이 전 세계의 문화콘텐츠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대중화된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2020년 7월, 프랑스의 지방 월간지 [Maxi Flash]는 2019년에 프랑스 내 케이팝 팬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는 수치를 제시한 바 있다. 백만이라는 수의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일견 수긍이 된다. 오늘날 프랑스의 청소년들은 케이팝이나 한국 드라마 및 영화 등의 특별한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주변 친구들을 통해 그 존재만큼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양적·질적 증가에도 아직은 하위문화
하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 청소년들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 양상이다. 이른바 야만의 시대라 칭할 수 있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서구의 제3세계 문화 수용과 제3세계의 서구 문화 수용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제3세계는 서구를 선진의 영역에 두고, 계몽의 목표로 삼았다. 반면, 서구의 시선에서 제3세계는 무언가 특이한 매력이 있는 미지의 세계에 불과했다. 제3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접근은 인류학이나 민속학, 지역학 등 여러 학문에 엄청난 발전을 가지고 왔으나, ‘엑조티즘’이라 불리는 이국 취향은 소수의 서구인 개인의 교양과 지적 호기심을 과시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류은영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문화보수적이고 자존적인 프랑스인은 이국의 문화를 즐기면서도 한편으로 터부시하는 양가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또한 이전에 누리던 국제적 위치를 박탈당한 현재 프랑스의 이국 취향은 “즐김과 경시라는 ‘자아도취적’ 정서가 아니라 위안과 소통이라는 ‘상호주체적’ 정서가 됐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점차 증가하고 있는 한국학 전공자 및 연구자의 수를 고려할 때, 오늘 프랑스 청소년들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 양상은, 물론 개인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더는 단순한 이국 취향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것으로 진단된다. 보다 진지한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괄목할 만한 양적·질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에서 한국 문화는 하나의 하위문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프랑스에 있어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먼 나라이며, 엄청난 열정과 흥분으로 한국학 전공자가 된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진로의 협소함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하나의 하위문화에 불과한 프랑스 내 한국 문화는 미래의 어떤 지점에는 보다 그 비중이 커질 것이라 예상한다. 특히 지금의 청소년 혹은 20대 청년들이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의 프랑스에서 한국은 현재와는 또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을까.
- 홍소라 프랑스 라로셸대학교 응용외국어학과 부교수 sora.marion.h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