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 대신 ‘행복’ 찾겠다는 세청년, 주입식 대학교육 거부하는데… [왓칭]
인도판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세 얼간이'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진부하지만 필요한 외침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정한 입시 경쟁을 비판하는 명대사로 손꼽힌다. 어찌 보면 그 당시보다 ‘입시 비리’ 문제와 ‘취업난’이 사회적 화두로 크게 떠오른 현재에 더욱 뼈아픈 대사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취업난이 심한 요즘 청년들 사이 “행복은 성적 순이 맞고, 성적은 부모님 재력 순”이란 자조 섞인 소리까지 나온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주제로 국내에서 꾸준히 인기를 끈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인도판 ‘죽은 시인의 사회’란 애칭을 얻은 영화 ‘세 얼간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주입식 대학 교육과 성공만을 조ㅊ쫓는 사회 통념에 도전하는 세 인도 청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2009년 인도 현지에 개봉된 이 영화는 그 해 발리우드 영화권 내 최고 흥행을 거뒀고, 2011년 국내 개봉 때는 4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 인지도가 낮은 인도 영화로는 이례적인 성과였다. 지난해에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지민이 이 영화를 봤다고 언급한 사실을 인도 현지 매체들이 중점 보도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괴짜 청년 란초로 모인 삼총사, “주입식 대학 NO”
영화는 인도 최고의 명문 공대 ‘ICE(Imperial College of Engineering)’를 졸업한 후 사라진 ‘란초다스 샤말다스 찬차드’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동창생 ‘파르한 쿠레쉬’와 ‘라주 라스토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대학은 실제 인도의 초일류 국립 공과대학 ‘IIT(Indian Institutes of Technology)’를 모델로 한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각 지역 수재들이 모인 ICE에서 란초는 유독 ‘괴짜’로 불렸다. 그는 입학 첫날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선배들이 도장을 찍어주는 이 학교의 오랜 전통을 모욕적인 행위라며 거부한다. 바지를 내리지 않는다며 한 선배가 란초의 기숙사 방문에 오줌까지 쌌지만, 란초는 그 즉시 숟가락과 누전 차단기로 만든 전기충격기로 이 선배를 혼쭐내며 끝까지 엉덩이를 내보이지 않는다.
란초는 특히 학생들에게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며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강요하는 대학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며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던 ICE 총장 ‘바루 사하스트라부떼’는 “자신이 교수보다 낫다고 생각하냐”며 강제로 란초를 강단에 서게 한다. 그러자 란초는 학생들에게 알 수 없는 단어 두 개를 칠판에 적은 뒤 30초 안에 정의를 내리게 한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었지만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답에 따라 성적을 매기겠다는 란초의 말에 문제의 오류를 의심할 생각도 없이 정답 찾기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30초 뒤, 란초는 학생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렇게 말한다.
서커스의 사자도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법을 배우지만, 그런 사자는 잘 훈련되었다고 하지 잘 교육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상향 vs 현실, 우리의 닮은꼴은?
사실 이런 란초의 모습을 현실에서 쉽게 찾아보기란 어렵다. 혹여 있다 해도 “배부른 소리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대학의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는 란초지만, 정작 대학 생활 5년 내내 각종 시험에서 학년 수석을 차지하는 ‘천재’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란초는 자신의 성적이 좋은 이유로 “공학을 즐기며 공부해서”라고 말하지만, 공부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선 솔직히 천재의 만용으로만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와 함께 어울려 다니던 절친 ‘라주’와 ‘파르한’ 또한 비현실적인 인물이긴 마찬가지다. 한 달 수입이 2500루피(한화로 약 4만원 안팎)일 정도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라주는 늘 집안 걱정으로 공부에 몰두하지 못 한다. 그 결과 4년 내내 낙제점을 받고, 총장이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 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극단적 선택까지 하지만, 친구들의 지극한 간호로 기적적으로 살아나 단 한 번의 면접으로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다. 1학년 때부터 로스쿨, 공무원 등 각종 시험준비로 도서관 붙박이를 자처하는 요즘 대학생들 입장에선 “말도 안 돼”란 소리가 절로 나올 상황이다.
또 다른 친구 ‘파르한’은 어떠한가. 파르한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강권으로 ‘엔지니어’가 되길 희망한다. 인도에서 엔지니어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직업으로 각광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르한은 야생동물 사진작가를 꿈꿨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다 보니 역시 라주처럼 성적은 낙제점이었다. 그런 그가 존경하던 헝가리 사진 작가에게 자신을 조수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준비했지만 차마 부치지 못 하자, 란초가 이 편지를 대신 보내준다. 거짓말처럼 파르한은 그 작가의 조수로 채용돼 성공한 사진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역시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들 세 친구와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지는 ‘차투르 라말링감’이 오히려 현실성 있게 느껴진다. 극 중 차투르는 친구들에게 성공만 쫓는 모습으로 비호감을 사는 ‘속물 엘리트’로 불린다. 기억력 증진을 위해 돌팔이 약을 먹은 뒤 부작용으로 여기저기서 방귀를 뿡뿡 뀌고 다니고, 시험을 위한 주입식 암기에만 몰두하며, 시험 전날 경쟁자들의 공부를 방해하려고 그들의 기숙사 방에 성인 잡지를 밀어 넣는 치졸함까지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차투르는 그 누구보다 학업에 열중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란초 일행이 조작한 연설문을 그대로 외워 읽는 바람에 전교생과 교직원 앞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망신을 당하는 모습은 불쌍할 지경이다. “네 방식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며 란초를 비판하는 차투르의 목소리야말로 현실 속 수많은 우리의 목소리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 이즈 웰”이 주는 위안
그럼에도 란초 일행의 기행(奇行)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극 중 란초는 항상 걱정거리가 많을 땐 모든 것이 잘 될 거란 뜻의 ‘알 이즈 웰(All is well)’을 외친다. 이런 란초의 말은 얼핏 보면 지나치게 이상적이지만,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 말을 통해 극 중 라주가 변화를 겪는 모습은 비록 현실성은 떨어져도, 울림 만큼은 결코 적지 않다. 라주는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낙제점 투성이인 성적표를 들고 면접에 가기 전 자신의 손에 끼어 있던 반지를 모조리 빼버린다. 모두 평소 몸이 아픈 아버지, 홀로 돈을 벌며 옷 한 벌 사보지도 못한 어머니, 지참금이 없어 시집을 못 간 누나를 걱정하며 신에게 기도할 때 쓰던 반지들이다. 이 반지의 무게만큼 그는 항상 자신이 성공해 집안을 일으켜야만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에 허덕여 왔다.
하지만 ‘알 이즈 웰'을 되뇌이며 그 반지를 모두 떨궈낸 라주는 면접장에서 홀가분하게 “이 면접에서 떨어져도 유감은 없다. 여전히 제 삶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를 면접관들은 수많은 ‘예스맨’ 중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채용한다. 취업난이 극심한 요즘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긴 하나, 한번쯤 면접장에서 이런 말을 서슴없이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본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흙수저’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라주의 성공인만큼 보는 이들을 기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결국 개개인의 성공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교훈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진짜 주제일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취업이 어렵고, 삶이 팍팍해지면서 잊게 됐던 그 교훈을 시원하게 대신 외쳐주는 란초 일행의 “알 이즈 웰!”이야말로 영화적 상상이기에 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만 하는 외침이지 않을까.
개요 영화 l 인도 l 2009 l 2시간 43분
등급 12세 관람가
특징 란초 일행을 따라 외치다 보면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질 것만 같은 한 마디. ‘알 이즈 웰'!
평점 로튼토마토🍅100% IMDb⭐8.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