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40대 남성도 ‘한드’에 빠져… 성별-장르 뛰어넘은 ‘4차 한류’
[위클리 리포트]일본은 지금 新한류 열풍
‘혐한’ 뚫고 하이킥, 기존 한류와는 다르다
콘텐츠 완성도가 승부 갈라
최근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빈센조’다. 올 2월 국내 방영과 함께 일본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된 이 드라마는 4월 7일 ‘오늘 일본의 톱10 콘텐츠’ 1위를 차지했다. 종영한 지 한 달이 지난 5월 27∼29일에도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에 이어 빈센조 까지 히트를 치자 일본 언론도 한국 드라마의 인기 요인에 주목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10일 ‘한류 드라마가 혐한 비율이 높은 중년 남성에게도 인기를 끄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힌 생활을 하게 되면서 40대 남성들까지 한국 드라마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K팝 아이돌 그룹의 일본 내 인기도 치솟고 있다. 올 3월 일본 음악계 최고 권위 시상식인 ‘제35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에서 한국 아이돌 그룹이 주요 부문 트로피를 휩쓸었다. 방탄소년단(BTS)은 베스트 아시안 아티스트를 비롯해 8개상을 차지해 골드디스크 대상 다관왕 기록을 갈아 치웠다. K팝 아이돌 그룹의 오리콘 차트 점령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 출신의 보이그룹 엔하이픈은 두 번째 미니앨범 ‘보더: 카니발’로 5월 1, 2주 연속 오리콘 주간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한 가수가 올해 오리콘 주간 앨범차트에서 연속 1위를 차지한 건 엔하이픈이 처음이다.
바야흐로 일본에서 ‘4차 한류’ 바람이 거세다. 2004년 ‘겨울연가’로 시작된 1차 한류에 이어 빅뱅, 소녀시대, 카라 등이 중심이 된 2010년대 붐은 2차 한류로 분류된다. 3차 한류는 일본에서 5회 연속 앨범 판매량 25만 장을 넘긴 트와이스가 주도했다. 1∼3차 한류의 경우 콘텐츠 소비세대와 장르가 한정적이었다. 이에 비해 4차 한류에서는 세대는 더 확장됐고, 장르도 드라마, 영화, 음악, 웹툰 등으로 다각화됐다. 일각에서는 1980, 90년대 아시아 문화의 전진 기지로 기능한 일본의 역할을 한국이 대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차 한류를 이끈 겨울연가는 40대 이상 중년 여성이 중심이었다. 아이돌 위주의 2, 3차 한류에서는 1020세대 여성이 핵심 소비층이었다. 하지만 4차 한류부터 한국 콘텐츠는 특정 계층만 향유하는 서브 컬처가 아닌 전 세대가 즐기는 주류 콘텐츠로 부상했다. 지난해 일본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를 끈 ‘사랑의 불시착1’위)과 ‘이태원 클라쓰’(2위)가 대표적이다. 일본 넷플릭스는 지난해 인기를 끈 콘텐츠를 분석한 리포트에서 국내 드라마 ‘스타트업’을 예로 들며 “한국 드라마는 러브 스토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스타트업은 어려운 현실에도 절망하지 않고 인생을 개척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그려 여성뿐 아니라 남성 팬도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일본 문화계는 개별 콘텐츠나 아티스트를 넘어 한국의 콘텐츠 제작 시스템에 주목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BTS의 빌보드 차트 석권 등 한국 문화 콘텐츠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사례가 쌓이면서 한국의 성공 방정식을 배우려고 하는 것. 소니뮤직이 JYP와 손잡고 진행한 일본 걸그룹 선발 오디션 ‘니지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1∼6월 훌루와 유튜브에 공개된 니지 프로젝트에서 박진영은 아이돌 지망생인 일본인 참가자들을 프로듀싱했다. 그는 최종 선발된 9인으로 ‘니쥬’를 만들어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데뷔시켰다. K팝 아이돌을 육성하는 국내 매니지먼트사의 방식을 일본 연예계에 적용한 것이다. 니쥬의 데뷔 싱글 ‘Step and a step’은 일본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2위의 앨범 판매액을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조규헌 상명대 한일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기존에는 한국의 능력 있는 가수나 그룹이 중심이 돼 일본에서 활약했다면 이제는 이들을 만들어 낸 프로듀서까지 주목을 받고 있다”며 “니쥬 사례는 박진영으로 대표되는 한국 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일본이 배우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4차 한류를 가능케 한 건 일본에 비해 높아진 한국 콘텐츠의 완성도다. 내수시장이 작아 일찍이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려고 애쓴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분석이다. 최경희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조사연구팀장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통해 국내 창작자들은 국내외 소비자의 니즈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민감성이 특히 높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통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자연스레 제작비 상승으로 이어졌다.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회당 제작비가 16억 원, 지난해 ‘더 킹: 영원의 군주’는 20억∼25억 원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일본 드라마의 회당 제작비는 2억∼3억 원 수준이다. 일본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7월 ‘기생충,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히트 연발의 한류, 일본 콘텐츠가 이길 수 없는 이유’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골든타임 시간대 드라마의 평균 제작비가 2000만∼3000만 엔(2억∼3억 원) 수준이며, 최고 수준 제작비는 5000만 엔 정도라고 보도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지상파 3사 드라마의 회당 평균 제작비는 3억7000만 원이다. 일본의 현재 드라마 회당 제작비가 8년 전 국내 드라마 회당 제작비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국내에선 인기 배우와 실력 있는 감독, 작가들이 참여하는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지향하다 보니 제작비가 올라간 측면이 있다.
서장호 CJ ENM 콘텐츠사업부 상무는 “일본은 아직 DVD 등의 다양한 시장이 존재하고 유료 콘텐츠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덜해 국내 소비자만 겨냥해도 수익을 낼 수 있다”며 “반면 한국은 해외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제작비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유통 채널이 확대돼 고품질의 한국 콘텐츠를 일본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4차 한류의 견인차로 작용했다. 기존에는 한국 콘텐츠를 일본의 TV, 라디오 등 전통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최경희 팀장은 “채널 다양화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는 한국 콘텐츠의 장르가 다양해지고 이를 즐기는 세대가 넓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폰 익숙 1020세대가 주도… 디지털 만화시장, 종이 앞질러
“K웹툰이 새로운 시장 이끌어”… 현지 출판사들 뒤늦게 경쟁 가세
지난달 24일 일본 도쿄 시부야의 한 공유 사무실. 게이유(慶優) 씨가 펜에 잉크를 찍어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전쟁고아의 일대기를 그린 일본 웹툰 ‘복수의 빨간선’의 만화가다. 이 작품은 원작자, 프로듀서 등 5명이 한 팀이 돼 만들고 있다. 제작 방식이 분업화됐다는 점은 한국 웹툰과 비슷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컴퓨터에 직접 그리지 않고 종이에 그린 뒤 이를 스캔해 디지털화한다. 게이유 작가는 만화가로 활동한 지 10년이 됐지만 웹툰 경력은 3년 남짓이다.
게이유 작가의 작품은 한국 정보기술(IT) 기업 ‘카카오’가 일본에서 서비스 중인 웹툰 플랫폼 ‘픽코마’에 연재되고 있다. 그는 “일본 젊은층이 휴대전화를 통해 웹툰을 즐겨 보는 것을 알고 뒤늦게 도전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만화 강국인 일본의 만화 시장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 일본 출판업계 조사 연구기관인 ‘전국출판협회·출판과학연구소’가 2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만화 매출액(시장 규모)은 6126억 엔(약 6조2178억 원)으로 1978년 통계 조사 발표 이래 최대치다.
특히 전자책, 웹툰 등이 포함된 디지털 만화의 성장세는 종이 만화보다 가파르다. 지난해 디지털 만화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32% 증가한 3420억 엔(3조4724억 원)으로, 이미 종이 만화 시장(2706억 엔·2조7465억 원)을 압도했다. 전국출판협회·출판과학연구소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모바일 기기를 통한 만화 열독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일본의 만화업계는 이런 흐름에 한발 뒤처졌다. 일본 웹툰 플랫폼 ‘톱 2’인 네이버의 ‘라인망가’(이용자 수 612만 명)와 픽코마(452만 명) 모두 주체가 한국 업체다. 두 곳의 인기 순위 상위권에도 한국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 픽코마의 6월 1일 종합 순위 10위 안에 ‘나 혼자만 레벨 업’(1위), ‘나는 마도왕이다’(3위) 등 한국 작품이 6개 있다.
일본의 웹툰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스마트폰에 익숙한 10, 20대다. 이들은 목적에 따라 특정 서적을 사고 이를 정독하는 종이 만화 독자와 경향이 다르다. 웹 서핑이나 인기 순위 위주로 만화를 고르고, 이동 중 짬을 내서 만화를 본다. 웹툰 프로듀서 스즈키 메구미(鈴木愛美) 씨는 “종이 만화 독자가 웹툰 시장으로 이동한 게 아니다. K웹툰에 의해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스크롤 만화 시장’이 새로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귀멸의 칼날(鬼滅の刃)’의 최종화(제23권) 단행본은 올해 상반기 일본 내에서만 498만 부가 팔렸다. 누적 판매량(1∼23권)이 1억5000만 부에 달하는 등 일본 내 종이 만화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K웹툰이 디지털 전환에 늦은 일본 만화업계의 틈새를 공략하면서 일본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나카노 하루유키(中野晴行) 교토세이카(京都精華)대 만화학부 객원교수는 “일본에서 디지털 만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5년 남짓”이라며 “책방-중개상-출판사로 대표되는 종이 만화 유통 고리가 굳건해 디지털 시장으로의 전환이 늦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좁은 공간에 모여 수작업을 하는 종이 만화 제작 체계에 대한 자성도 나오고 있다. 일본 대표 출판사인 슈에이샤(集英社)의 주간 만화 잡지는 지난해 4월 편집부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나와 휴간된 적이 있다. 이런 영향으로 슈에이샤가 순정만화 전문 웹툰 플랫폼 ‘망가 미’를 내놓는 등 기존 출판사들도 뒤늦게 웹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일본 내 한국 웹툰 플랫폼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으며 “만화 강국인 일본의 세계시장 개척이 지체되고 있다. (K웹툰의) 세로 읽기 방식이 세계 표준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나카노 교수는 “웹툰 최대 시장인 중국 등 세계시장을 공략해야 하는데 현재 일본 웹툰은 한국에 비해 경쟁력이 약한 편”이라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