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통신]‘더 파더’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앤서니 홉킨스의 체력 비결
[2657호] 2021.05.10
LA=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 photo 뉴시스
‘양들의 침묵’에서 인육을 포도주와 함께 즐기던 한니발 렉터는 나이가 들면서 ‘자비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엷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질문에 성심껏 대답했다. 한니발 역으로 아카데미상을 탄 앤서니 홉킨스(83)는 넷플릭스 영화 ‘더 파더(The Father)’에서 악화하는 기억력과 싸우면서 딸(올리비아 콜맨 분)이 주선하는 간병인의 도움마저 거절하는 치매 노인으로 나온다. 그는 이 영화에서 조용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연기를 선보여 얼마 전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탔다. LA의 자택에서 영상 인터뷰에 응한 홉킨스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얘기해 주듯이 다정하고 차분하게 근황과 이번 역에 대해 설명했다.
- 코로나19 사태로 자택에 갇혀 살다시피 할 텐데 어떻게 지내는가.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 이제 나이가 많으니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독서를 하고, 또 피아노를 치면서 만족스럽게 보낸다. 지난 5~6년간 쉬지 않고 일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괜찮다. 그저 배우로서 오랫동안 일해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 이번 영화에서 당신은 현실과 환영을 혼동하면서 갈팡질팡하는데 당신에게 환영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내 과거를 돌아보니 전 생애가 하나의 환영처럼 느껴진다. 내 생애가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쓴 각본처럼 보인다. 내 삶이 어떻게 이렇게 전개되어 왔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 삶이란 내가 통제할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어떤 신비에 의해 이어져 온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난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이 나이에도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하고 자문하곤 한다. 삶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론 내 인생이란 것이 누군가 다른 사람 생애의 긴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 영화 속 인물과 내 나이가 비슷해 연기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이 있다. 내가 연기한 인물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도 영화 속 인물처럼 도전적이요 강인했고 또 논쟁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과연 우리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자문했다. 삶은 의문투성이 같다. 난 지금 그 의문 속에서 평화를 찾고 있다. 요즘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피아노를 치는데 머리를 활력 있게 하고 또 맑게 하기 위해서다.”
- 마음과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매주 다섯 차례 체육관에 가서 신체 단련을 한다. 역기를 들고 트레드밀에서 뛴다. 날 때부터 근육질로 튼튼하게 태어났다. 웨일스 사람들의 특질을 이어받은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아주 강하다. 또 책을 많이 읽고, 명상을 하고, 명랑하려고 애쓴다. 특히 요즘처럼 어두운 기분에 잠기면 거기서 빠져나올 길이 없나 하고 생각하면서 세상은 이전에 더 힘든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내 인생이 가져다준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배우란 매우 힘든 직업인데 내가 미국에 건너와 이렇게 활발하고 훌륭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내가 성인(聖人)이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난 아주 인간적이다. 이렇게 장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은 삶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에 달려 있다. 삶이 때론 힘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 힘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 당신은 매우 재주 있는 화가로 알려졌는데 요즘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 “끊임없이 얼굴과 눈을 그리고 있다. 난 훈련받은 화가도 아니요, 미술에 대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그저 즉흥적으로 그릴 뿐이다. 작은 화실에 들어가 캔버스를 건 뒤 그리기 시작한다. 어떤 사전계획도 없고 또 무엇을 그리려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린다. 작가 헨리 밀러가 말한 ‘그리고 행복하게 죽어라’라는 조언을 따르고 있다. 어떤 목적도 없이 그리는데 사람들이 좋아해 잘 팔린다. 라스베이거스와 하와이에서 전시했을 때도 잘 팔렸다. 난 색깔을 좋아하는데 요즘에는 다양한 색깔에 대해 실험 중이다. 아내 스텔라가 컬럼비아 태생이어서 앞으로 컬럼비아 특유의 색깔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내 그림은 어떤 스타일도, 또 형태도 없다.”
- 당신이 맡은 역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나이가 점점 들면서 연기를 큰 문제로 삼거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각본이다. 그것을 지도로 삼고 길을 찾듯이 자신의 대사를 숙지해야 한다. 길을 가다가 잠시 샛길로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 샛길이란 자신의 역을 각본의 그것과 달리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본을 새로 쓰는 것은 배우의 일이 아니다. 연기의 비결은 남이 말할 때 경청하는 데 있다. 메릴 스트립도 말했듯이 연기할 때 결코 긴장해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을 느슨하게 해야 한다. 또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맡은 역과 대사를 숙제처럼 생각하고 철저히 완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사를 끊임없이 숙지해 맡은 역을 두 번째의 자신처럼 만들어야 한다. 젊었을 때는 사실적이고 긴장감 가득한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젠 그것이 몸에서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보다 쉬워진다. 그래서 요즘 ‘평소의 연기와 대사를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라’고 말하던 로버트 미첨과 윌리엄 홀든을 사부로 삼고 있다.”
- 이번 영화의 대사를 숙지할 때 혼자서 했는가, 아니면 다른 배우들과 함께 했는가. “모든 출연진과 함께 했다. 그런데 앤서니 역은 미래의 나를 연기하는 것 같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난 아직 기억력을 상실하진 않았지만 쇠퇴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난 배우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연기를 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한다거나, 너무 깊이 파고들거나, 바짝 긴장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앤서니 역은 지금까지 한 그 어느 역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내 연기를 본 후 어떻게 그렇게 힘든 역을 즐길 수 있느냐고 묻곤 하는데 난 ‘일하기를 즐기기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을 즐긴다’고 대답한다. 집에서 나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즐긴다. 오랜 시간에 거쳐 로렌스 올리비에, 피터 오툴, 캐서린 헵번 등과 같은 위대한 배우들과 일하면서 그들에게 배운 것이다. 그래서 연기란 것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연기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 시간에 현장에 나와 연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두들 참으로 우아했다.
나도 이들처럼 우아함을 갖춰 연기하고 각본, 다른 배우들, 제작진을 존경할 줄 알게 되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존중하면 삶이 보다 편해진다. 그건 천재만이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먹은 후에도 너무 쉽게 연기하는 험프리 보가트와 스펜서 트레이시, 그리고 베티 데이비스의 영화를 보면서 즐기고 있다.”
- 부인 스텔라가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 ‘엘리즈’에 당신이 출연했는데 그 경험에 대해 말해 달라. “각본도 스텔라가 썼는데 내 아내는 매우 뛰어난 감독이다. 정말로 대단한 영화다. 연기하기도 쉬웠다. 아내가 아주 자랑스럽다. 좋은 영화인데 난 거기서 정신과 의사로 나온다. 공연한 배우들도 다 훌륭한 연기를 했다. 아내를 위해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아내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내가 감독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아주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