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조용히 살고 싶다”… 내레이션조차 없는 ‘멍TV’ 10분
눈과 귀에도 휴식이 필요해
11일 자정을 넘긴 12시 30분. TV를 켜자 화면에 빙글빙글 회전하는 화로가 보인다. 그 위로 고등어 두 마리가 놓인다. 푸른빛의 고등어가 노릇노릇 익어간다. 아나운서도, 내레이션도 없다. 사람 목소리는 배제하고 가스불 소리나 화로가 돌아가는 소리 등 현장 소음만 들린다. 10분간 고등어 굽는 모습만 보여주다 프로그램은 끝난다. 공중파 EBS가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월~목요일 밤에 방영하는 프로그램 ‘가만히 10분, 멍TV’다. 장어 굽기·닭튀김 등 요리부터 초승달·대나무숲·연못 속 물고기 같은 자연, 63빌딩·광안대교·서울역·광화문 등 도시 풍경까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아무런 설명이나 장면 전환 없이 있는 그대로 쭉 보여준다. 추덕담 총괄 프로듀서(CP)는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영상을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제작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형식의 시도에 방영 초기 “방송 사고가 났다”는 항의까지 받았지만, 이제는 “이 방송 없이는 잠에 들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제법 충성 시청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온갖 정치·사회 뉴스는 시종일관 현대인의 귀를 때리고 눈을 어지럽힌다. 이미 코로나 시대 이전에도 한강변과 서울시청광장에서 ‘멍 때리기 대회’가 있었다.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은 지난달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룸에서 음악을 듣는 ‘바다 멍’ 예약 상품을 출시했는데 첫 주 만에 마감됐다. 오프라인에서 열리던 쉼표 행사는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사람들은 정보의 쓰나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잠시 쉬고 싶다’는 욕망도 콘텐츠를 소비하며 해소한다. 유튜브에선 일상적인 소음이 담긴 ASMR 영상이 이런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멍 때리기’ ‘꿀잠’ ‘스트레스 해소’란 꼬리표(해시태그)를 단 영상들은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한다. 별생각 없이 흘려들을 수 있으면서 귀에 자극을 주지 않는 소리가 특징이다. 자연 풍광을 보여주거나 음식을 먹는 ‘먹방’을 넘어 머리 감기, 빗질하기, 귀 파주기, 마사지, 목욕하기, 화장품 바르기, 장난감 가지고 놀기 등 영상 종류도 다양해졌다. 영상 재생 시간은 보통 10분을 넘지 않는다. 긴 호흡보다는 짧은 콘텐츠를 선호하는 젊은 층의 시청 습관을 고려한 결과다.
이런 흐름을 따라 유명 가수들도 읊조리는 듯한 창법과 차분한 멜로디를 내세운 음악을 발표하고 있다. ASMR 영상을 자신의 유튜브에서 선보이기도 했던 아이유는 최근 발매한 앨범에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악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발라드곡을 여럿 실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음원 차트에는 아이돌과 힙합 음악을 제외하고 이른바 ‘고막 애인’으로 불리는 듣기 편한 음악들이 순위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팝의 여왕이던 테일러 스위프트는 지난해부터 인디 음악 감수성을 갖춘 포크·컨트리 앨범을 잇달아 발표해 음악적인 성공을 이어나가며 변신에 성공했고, 빌리 아일리시는 몽환적이면서 음울하고 나른한 음악으로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자)의 아이콘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