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한국에서 온 메시지였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ㅎㅎ” 평소 한국 기자들로부터 일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기에,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인가요?”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성 대신의 ‘펀쿨섹’ 발언에 대한 한일 양국의 반응이나, 한국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의 ‘비혼 인공수정’ 관련 일본 법안 등 재미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 기자였기에 어떤 질문이 나올지 궁금했다. 돌아온 질문은 의외였다.
넷플릭스와 일본 시장의 판도에 대한 이야기는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한국 기자들이 질문을 보낼 경우 나는 일본 언론이 내놓은 기사나 네티즌의 댓글을 정리해 보내주는 등, 웬만하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아무리 뜯어봐도 일본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뭔가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정반대의 내 모습을 보는 듯, 자기 자신인 건 틀림없는데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알고 보니 한국에서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박봉에 시달리는 일본의 젊은 애니메이션 노동자들을 넷플릭스가 구원했다더라’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일본 언론에서 내놓은 기사 일부를 짜깁기한 게시물은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기대가 있긴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거액의 투자와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극장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귀멸의 칼날〉 등 세계적인 히트 작품이 출시되고 있기에, 업계에 대한 전반적인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2019년 11월에는 인기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등의 제작사와 이례적인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오리지널 작품 독점 공개를 발표해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넷플릭스의 투자는 단기적인 작품 제작 단계에서 그치지 않았다. 장기적인 애니메이터 육성에도 손을 댔다. 제휴를 맺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위트 스튜디오가 운영하는 ‘애니메이터 육성 학원’의 커리큘럼을 직접 감수하고, 수강생의 수강료와 생활비를 지불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학원을 졸업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입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넷플릭스가 애니메이터 양성에 직접 나선 셈이다.
찾아보니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은 이와 관련된 뉴스를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변화를 점친 모양이었다. 댓글을 살펴보니 “저기 들어가면 생활비랑 기숙사를 전액 지원하고, 졸업하면 바로 넷플릭스 취직에 연봉도 높다” “게다가 해외 기업이라 일본 기업보다 대우가 좋을 것이다” 등의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 제작 업계의 경우 넷플릭스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아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이후 “제작비 상승으로 스태프 비용과 개런티 등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으니 한국 네티즌들의 입장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 듯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 제작 업계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상황은 다르다. 애니메이션 업계의 박봉은 여전하다. 사단법인 일본 애니메이터 연출 협회가 지난 2019년 11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절반 이상이 프리랜서, 즉 비정규직이었으며 전체의 41%가 300만 엔(한화 약 3100만원)에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었다. 열악한 상황을 견디고 있는 이유를 묻자 68.6%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즐겁다”는 답변을 했다. 한국에서 ‘열정페이’라고 부르는 구조 그대로인 듯하다. 물론 2019년 자료이니, 넷플릭스가 일본에 진출한 이후의 영향이 완벽하게 반영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진짜 문제는 ‘열정페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열정페이’가 비판받는 건 꿈을 위해 정진하는 젊은 인재들을 정당하지 못한 가격으로 부려먹고, 실제 이득은 ‘높으신 분들’이 전부 가져갔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도 그랬을까? 애니메이션 업계의 내막을 다룬 소설 ‘델타의 양’을 쓴 일본 작가 시오다 다케시는 책을 발표하고 난 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 ‘제작위원회에 나쁜 놈이 있고, 번 돈을 애니메이터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구상하게 됐죠.” 여기에는 반전이 있었다.
즉 ‘열정페이’의 문제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는 모두가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관계자들은 제작사의 구조적인 경영난을 지적한다. 기획부터 제작, 배급, 홍보, 로열티 관리까지 자기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맡고 안정적인 경영을 계속해온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 감독 같은 경우는 예외 중의 예외다. 〈너의 이름은〉으로 일본에서만 흥행수입 250억 엔을 기록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경우, 전작 〈언어의 정원〉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1억5000만 엔 수준이었다. 일본 TBS 방송국에서 경영기획국장, 콘텐츠 사업국장 등을 역임한 우지이에 나쓰히코는 “원래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0% 정도가 적자 경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라고 말하기도 했다. 방송사나 영화배급사,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계약이 작품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다. 스태프들도 작품마다 이합집산을 해야 하기에, 고용의 불안정성이 계속된다. 열악한 노동 구조가 반복되는 이유다. 앞에서 말했듯, 넷플릭스가 제휴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통해 애니메이터 장기 육성에 나선 것은 이런 악관행을 자본을 통해 해소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의 거대 자본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즐겁다’는 이유로 지금의 상황을 감내하는 젊은 애니메이터들의 구세주가 되어줄 수 있을까? 아직까지 넷플릭스의 진격은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