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는 다시 오지 않는다
- 입력
- 2021.04.03
전화 영어 학습으로 알게 된 에이미는 30대 미국인이다. 지난해 첫 통화 때 그는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2020)에 빠져들어 있었다. “비슷한 외모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삶을 사는 모습이 흥미롭다”고 했다. 뉴스로 북한과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접하다 보니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에이미는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미스터 션샤인’(2018)에 도전해 보라고 했다. ‘미스터 션샤인’에 몰입하던 에이미는 배경 역사를 꼬치꼬치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을사늑약도, 한일강제병합도, 일제의 식민 수탈도 알지 못했다. 에이미에게 드라마 속 역사적 맥락은 정서적 장벽이었다.
2000년대와 2010년대는 ‘팩션’의 시대였다. 팩션은 사실(Fact)을 바탕으로 허구(Fiction)를 더한 사극을 의미한다. 팩션으로는 드라마 ‘대장금’(2003~2004)과 영화 ‘왕의 남자’(2005),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등이 대표적이다. ‘미스터 션샤인’도 팩션에 해당한다. 팩션은 역사라는 익숙한 맥락에서 허구로 호기심을 자극하며 관객을 영상 앞으로 끌어당긴다. ‘왕의 남자’를 예로 들자면 연산군의 광폭한 성정을 익히 알기에 관객은 궁궐에 들어간 광대 무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을 거라 예감하면서도 역사에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화면에 집중한다. ‘광해’의 경우 관객은 대신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광해군의 생애를 바탕으로 왕의 대역이 존재했다는 허구를 이물감 없이 받아들인다. 사극은 화려한 궁궐 생활과 수려한 의상 등 볼거리를 제공하며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현대극보다 제작비가 보통 1.5배 더 들어감에도 팩션이 유행했던 이유다.
최근엔 흐름이 바뀌었다. 사극에 장르가 결합하고 있다. 2019년 첫 선을 보인 넷플릭스의 ‘킹덤’ 시리즈가 대표적 사례다.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궁중 암투에 좀비를 연결 지었다. 사극과 좀비의 만남은 장르의 전형성을 무너뜨리며 색다른 재미를 안겼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좀비에 맞서는 왕자의 모습만으로도 눈길을 잡는다. ‘킹덤’은 해외에서도 인기를 모았는데, 갓에 열광한 서구인들이 갓 구매처를 알아보는 기현상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킹덤’에는 실존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혼란스러웠던 조선 후기라는 시공간만 필요했을 뿐이다. 한국 시장 밖까지 겨냥해 만든 드라마이니 상세한 역사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왕이 좀비로 등장하는데, 실존했던 왕을 그리 불경스럽게 다루고 싶지 않기도 했을 것이다. ‘킹덤’은 사극이긴 하나 역사로부터는 거리를 둔 사극이다.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가 영상산업의 새 주류로 떠오르면서 탈역사적 사극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는 해외에서도 통하는 한국 콘텐츠를 원한다. 정통 사극은 물론이고, 팩션 역시 설 자리는 거의 없다. 최근 만난 한 중견 영화 제작자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사극 기획은 요즘 종적을 감췄다”고 전했다. 태종과 충녕대군(세종)에 대한 부적절한 묘사 등으로 방송 2회만에 폐지된 SBS 좀비 사극 ‘조선구마사’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할 듯하다. ‘킹덤’의 세상에 ‘왕의 남자’나 ‘광해’는 다시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