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여성의 “나랑 연애할래요?”라는 물음에 담긴 무게
21.03.24 13:59최종업데이트21.03.24 13:59
▲ 영화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KFC에 들어간 소영(윤여정 분)은 집에서 기다릴 민호(최현준 분)를 생각하며 닭을 주문한다. 작은 것으로 사려다가 같은 집에 사는 티나(안아주 분)와 도훈(윤계상 분)을 생각하며 큰 것으로 주문을 바꾼다. 횡재하듯 돈이 생겼으니 한 턱 내겠다는 기분이다. 주문한 닭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버거를 먹고 있는 흑인 병사가 눈에 들어온다. 곁으로 다가가 앉는다.
당황하는 병사는 "무슨 문제 있냐(Something wrong?)"고 물었고, 소영은 "당신이 정말 잘생겼다(You very handsome)"고 말한다. 우리 눈으로 봐도 흑인 병사는 혼혈처럼 보인다. 병사는 자신이 한국인 피가 섞인 '튀기'(한국 여성과 미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가리키는 속어)라고 밝힌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 군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빠가 떠난 후 엄마가 혼자 키울 수 없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그 사연을 듣는 소영은 얼빠진 표정이 된다. 그 표정에서 우리는 소영이 오래 전 품 안에서 떠나보낸 아들을 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영은 종로 일대에서 활동하는 나이 칠십을 눈앞에 둔 일명 '박카스 할머니'다.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노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소영은 인기만큼이나 주변의 질시도 심하게 받는다. 영화는 소영이 임질로 병원에 들렀다가 한 필리핀 여성과 의사와의 다툼을 목격하게 되고 가위로 의사를 찌른 필리핀 여성의 아들인 코피노 소년 민호를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려한 도심 속 낡은 옛 양옥집에는 트랜스젠더인 집주인 티나와 다리 하나가 없는 피규어 작가 도훈이 살고 있다.
소영의 삶은 고달프다. 마음 가는 대로 민호를 집으로 데려오긴 했으나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자니 하던 일을 멈출 수 없다. 돈을 벌러 나가려니 민호가 부담스럽다. 도훈에게 사정해서 맡겨 보기도 하고 함께 나가 단골 모텔 카운터에 맡기고 일을 하기도 한다. 마치 아이가 있는 보통의 일하는 여성 같다. 그가 하는 일이 법으로 금지되고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라는 점만 다를 뿐.
임질을 앓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소영은 일터를 탑골공원에서 남산 장충단 공원으로 바꾼다. 남산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옛 고객이던 재우(전무송 분)를 만나고 그를 통해 양복 입은 멋쟁이로 인심이 좋았던 세비로송(박규채 분)의 사연을 듣게 된다. 세비로송이 중풍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 있다는 소식에 소영은 요양병원으로 그를 찾아간다.
▲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 다음영화
혼자서는 밥은커녕 물 한 모금을 마실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비로송. 외롭고 수치스러운 삶을 마감하고 싶은 그는 소영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소영은 갈등한다. 그리고 신세를 갚는 심정으로 세비로송의 부탁을 들어준다. 또 하나의 뜻을 가진 글자 그대로의 "죽여주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재우와의 만남에서 소영은 세비로송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고백하고 재우의 부탁으로 비참한 노후를 맞이한 또 다른 옛 고객인 종수(조상건 분)의 죽음을 도와준다.
▲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 넷플릭스
얼마 후, 재우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다. 처음 가보는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상상도 못 해본 멋진 호텔로 둘은 들어간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5년 전 마누라까지 보낸 재우와 미군을 상대하고 흑인 병사의 아들을 낳아 멀리 입양을 보냈다는 소영.
재우가 간절히 부탁한다. 죽고 싶은데 너무나도 외로워 혼자서는 힘드니 죽을 때 곁에 있어 달라고. 그러면서 준비해온 수면제를 꺼내 한 알을 소영에게 주고 나머지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는다.
다음날 밝아오는 햇살에 눈을 뜬 소영은 자신의 곁에 반듯이 누워있는 재우를 발견한다. 황급히 호텔을 나온 소영의 가방에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돈뭉치가 들어있다.
이후 소영은 재우의 죽음과 관련하여 경찰에 체포된다. 경찰차 안에서 소영이 중얼거린다.
"차라리 잘 됐지, 뭐. 어차피 양로원 갈 형편도 안 되고. 거기 가면 세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요즘은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그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알 길이 없으나 소영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겨울을 맞이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길거리에서 만났던 젊은 감독 지망생과의 인터뷰에서 소영은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 먹고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꼴에 빈 병이나 폐지 주우면서 살긴 죽기보다 싫더라"며 "돈 되는 거 해. 늙어서 나처럼 개고생하지 말고"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내세울 건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다는 소영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화려한 도심 뒤켠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오랜 역사와 기구한 사연을 지닌 탑골 공원과 장충단공원, 50년 가까이 된 이태원의 낡은 양옥집이라는 배경이 기구한 사연을 지닌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성을 팔고 사는 노인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 이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또 다른 어두운 삶을 사는 트랜스젠더, 장애인, 이주민 등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진지하지만 담담하게 때로는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하나하나의 퍼즐이 맞추어지며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 얹은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초입에 나오는, 필리핀에서 아이 엄마와 아이를 버린 의사의 뻔뻔함이 40여 년 전 소영과 소영의 아들을 버린 한 미군 병사의 무심함과 겹쳐지고,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세태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에 급급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세상에서 버려진 듯 소외되고 쓸쓸한 노년을 맞이하는 삶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섬뜩하기까지 하다.
덧붙이는 글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