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훈 일본 ‘라미TV’ 운영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22
반크, 《귀멸의 칼날》 주인공 ‘욱일기 귀걸이 문양’ 항의…日, ‘램지어 비판’ 결부시켜 집중 비난
일본의 유력 극우 성향 언론들이 최근 일주일에 걸쳐 매우 비슷한 내용으로 한국의 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VANK)’에 대한 비난성 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반크를 비판한 이유는 한국에서 공개된 한 유명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귀걸이 문양 때문이다. 그 귀걸이는 욱일기를 연상시켜 한국에서 논란이 됐고, 반크가 이에 강하게 항의해 결국 다른 문양으로 수정됐다. 이에 일본의 극우 언론들은 최근 램지어 교수 논문 비판 등의 활동까지 결부시키며 반크를 ‘극단적 반일 단체’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들 기사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 한 명이 비슷한 내용으로 기고한 기사를 세 곳의 언론사가 연달아 게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해당 기사의 제목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귀멸의 칼날》 ‘욱일기’ 소동, 주도 단체 VANK란?」(WoW! Korea, 3월8일 보도), 「한국 《귀멸의 칼날》로 ‘욱일기’ 비난, 넷플릭스에서 ‘주인공의 귀걸이 수정’이라는 편의주의」(데일리신초, 3월9일 보도), 「주인공의 욱일기 귀걸이를 ‘호주에서도 수정하라’, 한국에서도 큰 인기 《귀멸의 칼날》을 노린 과격 민간단체의 정체」(분, 3월10일 보도), 「한국에서 《귀멸의 칼날》의 ‘욱일기 문양 사냥’이 격화, 넷플릭스의 반응은?」(겐다이 비즈니스, 3월12일 보도), 「주인공의 귀걸이도 트집 잡는 욱일기 혐오의 허탈감」(JBpress, 3월14일 보도).
《귀멸의 칼날》 영화 포스트. 오른쪽 위는 주인공의 욱일기 귀걸이 문양 수정 전(왼쪽)과 수정 후(오른쪽)ⓒ© 넷플릭스 캡처·워터홀 컴퍼니
《귀멸의 칼날》 한국 흥행에 ‘반일불매’ 조롱
그런데 이 5개의 기사 중 4개가 한국인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 3개는 프리저널리스트로 소개된 김아무개씨 한 사람에 의해 쓰인 것이다. 김씨는 램지어 교수를 옹호하는 기사를 극우 성향 언론사에 기고하는 등 일본 극우진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기사의 내용을 보면 입을 맞춘 듯이 구성마저 비슷했다. 게다가 3월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보도함으로써 반복에 의한 강조 효과를 노린 듯한 인상마저 들었다.
일본 극우 언론들이 이번 보도에서 반크를 공격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일본 역대 애니메이션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회현상화된 《귀멸의 칼날》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 집단을 퇴치하고 악귀가 된 여동생을 주인공이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극장판인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1월27일 한국에서 개봉됐다. 하지만 개봉 전부터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귀고리 문양이 문제가 됐다. 한국 내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급기야 배급사 측은 귀걸이의 문양을 수정해 개봉했다.
이런 논란 등으로 많은 전문가가 한국에서의 흥행은 힘들 것으로 전망했지만, 예상을 깨고 코로나19 시국에도 개봉 6주 만에 관객 동원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에 일본 언론은 한국에서 ‘일본 불매운동’의 힘이 꺾인 것 같다고 앞다퉈 전했다. 또 《귀멸의 칼날》이 한국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음에도 일부 반일 세력이 주인공의 귀걸이가 ‘욱일기’를 연상시킨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도 전했다.
얼마 뒤, 《귀멸의 칼날》의 욱일기 논란이 넷플릭스에서도 일어났다. 넷플릭스는 2월21일 《귀멸의 칼날, 시즌1》을 한국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넷플릭스에서 《귀멸의 칼날》 TV 시리즈가 공개되면서 공개 3일째에는 ‘한국 TOP 콘텐츠’ 3위에 들 정도로 인기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공의 귀걸이 문양이 수정 없이 공개되자 반크가 수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넷플릭스는 수정해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 극우 언론에서는 넷플릭스가 반크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는지, 결국 귀걸이 문양을 수정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한국이 ‘반일불매’를 호소하면서도 선택적 불매를 하며 일본 제품을 소비하는 기만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3월15일 서울 성북구 분수마루 광장에서 이승로 성북구청장(왼쪽 두 번째)과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및 계성고 재학생들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역사 왜곡 규탄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욱일기 문양’, 일본 내 인기 검색어 1위 올라
일본 언론은 “반크가 한국에 그치지 않고 호주 등 다른 국가에서 공개되는 영화 역시 욱일기 장면을 수정하도록 넷플릭스에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반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99년 설립됐다.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다케시마의 국제 표기를 독도로 바꿔야 한다고 요구하는 활동을 주도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의 욱일기 사용 금지 청원,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민원,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지 청원 등 다양한 ‘반일 글로벌 청원’을 이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반일 단체’다.”
그러면서 요즘 한국에서는 《귀멸의 칼날》뿐만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 마크 램지어 교수의 위안부 논문 문제 등 온갖 반일 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며, 램지어 교수 역시 한국에서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내용들이 일본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다. 이들 기사는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인 야후재팬에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됐다. 특히 3월12일 ‘겐다이 비즈니스’의 기사가 공개된 후, 한때 ‘욱일기 문양’이 인기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다수 일본 네티즌은 한국의 반응이 부당하다고 주장할 뿐, 욱일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평소 일본의 극우 언론들이 혐한 기사를 게재하는 것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그것도 비슷한 내용으로 언론사별로 일주일에 걸쳐 돌아가며 게재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만큼 ‘반크’의 활동이 일본 극우 세력에 눈엣가시라는 방증인 셈이다. 그런데 기사 대부분이 한국인에 의해 작성된 것은 램지어 교수 논문을 옹호하기 위해 일본의 극우 언론이 보여줬던 보도 행태와 비슷한 모습이다.
한편 램지어 교수 논문 사태에 관해서는 여전히 일본 주류 언론들이 애써 외면하는 모양새다. 특히 일본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이는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시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화제가 됐을 때 일본 언론 대다수가 큰 관심을 보인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