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이메일 바로가기
- 승인 2021.03.11 09:53
영국의 방송통신위원회라 할 수 있는 오프콤(Ofcom)이 지난해 12월 공공서비스방송의 미래와 관련한 연구 결과를 담은 협의안(Small Screen:Big Debate)을 발표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한 ‘신문과 방송’ 2월호에 따르면 오프콤은 현 고정형-실시간TV 채널 중심 유통 시스템으론 공공서비스방송이 생존할 수 없다고 보고, 온라인 중심의 시청 환경에서 수신료 납부자들이 공공서비스방송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저성’(Prominence) 확보에 주목했다.
영국에서도 BBC를 비롯한 공공서비스방송은 ‘필수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있다. 흔히 OTT라 부르는 SVoD(Subscription Video-on-demand) 이용이 급격히 증가해 지난해 오프콤 조사 기준 전체 영국 가구의 60% 수준인 1700만 가구가 넷플릭스와 같은 SVoD를 하나 이상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공공서비스방송 도달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이에 오프콤은 편성표를 벗어나, 디지털 환경에 맞게 공공서비스 프로그램을 제시할 최적의 장소, ‘중립 서비스’ 도입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오프콤은 스마트TV에 공공서비스방송 앱을 기본 설치하는 것을 제안했다. 현재 영국 스마트TV에는 아마존 프라임이나 넷플릭스 앱이 출시부터 탑재돼 있는데, BBC나 ITV 스트리밍 앱이 설치된 예는 드물었다는 것. 스마트TV에 자체적으로 BBC 앱이 설치되어 있다면 공공서비스 접근성은 높아질 수 있다. 오프콤은 또한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공공서비스방송 편성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고, 관련 법규를 만들 가능성도 시사했다.
오프콤의 아이디어는 결국 공적 콘텐츠가 영향력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콘텐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결국 수신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도 ‘접근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앞서 2013년 손석희의 JTBC도 메인뉴스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네이버·다음 포털 실시간 중계라는 ‘파격’을 택했다. 시청률을 포기하는 무모한 행위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는 게 대다수 평가다.
▲KBS.
한국은 스마트폰 보급률 전 세계 1위 국가이며, 어디서나 빠른 인터넷과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로 무장한 ‘디지털 강국’이다. 만약 스마트폰에 이른바 ‘공영OTT’ 앱이 기본 설치되어 있고, 가입이나 로그인도 필요 없다면 어떨까. 그곳에서 KBS와 EBS의 시사·교양·예능·드라마 콘텐츠를 고화질로, 무료로 ‘광고 없이’ 볼 수 있다면 시청자들은 지금과 다른 ‘접근성’을 경험할 것이다. 입법을 통해 해당 앱 사용 시 ‘제로레이팅’(데이터 사용 요금 할인 또는 면제)을 도입할 수도 있다.
넷플릭스 프리미엄 요금제는 4명이 접속할 수 있어 구독료를 1/4로 나눠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1인당 구독료가 월 3740원이다. KBS 수신료 목표액은 월 3840원이다. 오늘날 미디어 이용자는 넷플릭스·웨이브·왓챠 등 OTT를 이용하며 구독료를 내고 있다. 이들에게는 수신료 역시 구독료 개념으로 다가온다. 공영방송이라는 특별한 서비스비용으로 수신료를 설득시키려면 접근성에서 넷플릭스보다 가까워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수신료는 ‘KBS 지원금’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KBS와 EBS만으로 ‘공영 OTT’ 구성이 버겁다면 MBC와의 ‘연합’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공영 OTT’에선 공영방송이 보유한 수십 년 아카이브를 자산으로, 공적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콘텐츠를 보편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호평을 받았던 ‘모던코리아’ 같은 프로젝트가 늘어나야 한다. ‘채널 수백 개, TV로 KBS 안 보는데 시청료 왜 내나…시청자의 반란’. 지난 5일자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다. 제목에 답이 있다. KBS를 보게 만들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접근성’이 그 출발이다.
물론 ‘접근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준 높은 콘텐츠와, 이를 위한 자구노력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도 ‘KBS my K’ 앱을 설치하면 무료로 생방송 시청과 다시보기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를 자문해봐야 한다. 인터페이스가 아닌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1TV 일일드라마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최근 여지없이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지난 1월 종영한 ‘바람 피면 죽는다’ 같은, 다른 방송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 편성은 없애고 대신 자취를 감춘 정통 사극이나 ‘여명의 눈동자’ 같은 시대극으로 차별화해야 한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단막극 제작도 방법이다.
KBS는 ‘KBS만 할 수 있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방송에서 볼 수 있는 PPL 가득한 연예인 관찰 예능, 안 해도 된다. PPL을 보기 위해 수신료 내는 게 아니다. 연예인 출연료로 제작비가 부족한 게 이유라면 차라리 제작하지 말자. 대신 ‘양심 냉장고’(MBC) 같은 공적 예능을 시도하자. ‘전국노래자랑’처럼 지역성을 갖추고 시청자 참여도 가능한 프로그램을 늘리자. 모든 프로그램에 ‘공공성’을 투영하겠다는 일종의 ‘강박’이야말로 KBS의 ‘접근성’을 근본적으로 높이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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