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과연 어떤 텔레비전인가?
[좋은나라이슈페이퍼] 산업과 정책을 위한 넷플릭스 개론
임종수 세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기사입력 2021.03.02. 10:37:14
도처에서 OTT로 난리다. OTT의 무엇이 이토록 관심을 끄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그 전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OTT는 방송인가 아닌가? OTT 콘텐츠는 드라마인가 영화인가? OTT 수용자는 어떤 존재들인가? 다양한 버전의 OTT가 있지만 역시 OTT를 이해하려면 넷플릭스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넷플릭스를 경외하고 OTT를 칭송하는 소리는 있어도 그것이 도대체 어떤 미디어인지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국내 OTT 산업과 정책 모두 국경 안에 있는 ‘잡아놓은 물고기’ 수용자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만 몰두해 있다. OTT는 처음부터 로컬과 글로벌의 조합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90년대 미드 열풍 당시 한 두 개의 콘텐츠가 아니라 플랫폼 자체가 일상생활 속에 들어 왔을 때의 충격을 기억해야 한다. 전세계 넷플릭스 가입자만 2억명이 넘는 지금 왜 OTT 산업과 정책의 눈을 세계로 돌려야 하는지 알아보자.
첫째, OTT는 새로운 형식의 텔레비전이다. 용어 자체에 천착해 볼 때, OTT는 텔레비전(tele-vision)이지만 방송(broad-casting)은 아니다. 협송(narrow-casting)이지만 익명의 시청자에게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뿌리는 케이블TV 같은 서비스도 아니다. 오히려 OTT는 광대역망(broadband network)의 식별된 개인의 요청에 따라 1:1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통신에 가깝다. 하지만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다양한 방송 콘텐츠, 또는 유사 방송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상 방송이라 말한다. 그렇게 보면 OTT는 통신으로도 방송으로도 정의하기 힘든,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텔레비전’이다.
OTT는 기존의 텔레비전 방송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 중심에 문화기술로서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 배치와 인터페이스, 그와 연동되는 일괄출시(all-at-once release)와 몰아보기(binge watching)가 있다. 일괄출시는 OTT의 공간편성이 요구하는 플랫폼 전략과, 몰아보기는 OTT 특유의 서사극(epic) 콘텐츠 전략과 결부되는 키워드이다. 따라서 플랫폼 측면에서는 ‘일괄출시’와 ‘공간편성’으로, 콘텐츠 측면에서는 (오리지널) 콘텐츠의 ‘서사극’과 ‘몰아보기’의 범주에서 OTT를 사고하면 크게 실패하지 않는다.
둘째, OTT 플랫폼은 일괄출시와 공간편성이 핵심 특징이다. 일괄출시는 넷플릭스가 주도했고, 디즈니플러스 등 후발 OTT 주자들도 따라하는 출시 전략이다. 물론 웨이브나 티빙 같이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권 안에 있는 OTT는 정기적인 일 단위 출시를 여전히 고수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방사수를 하지 못하면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과거 채널 시대와 달리, 그런 OTT마저도 ‘본방’된 콘텐츠는 가상공간에 일목요연하게 배치된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굳이 ‘시간을 내어’ 본방사수하지 않고, 방송이 완료된 후 ‘시간을 내어’ 해당 콘텐츠를 소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에 구속받는 전통적인 시간편성의 권력은 거의 사라지거나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공간편성의 노하우와 전략이다. 시간편성이 시간대에 따른 하위 장르의 전략적 순차 배치가 중요했다면, 공간편성은 가상공간상의 전략적 평면 배치가 관건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시청자(대체로 가족)의 하루 또는 주, 월, 계절, 연 단위의 행동패턴을 예측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후자를 위해서는 시청자의 취향, 관심, 주목 간의 연결성, 정확하게 말하면 취향의 계열(affiliation of taste)을 고려해야 한다(OTT가 1:1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런데 취향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취향을 사람이 일일이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자동추천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 OTT 콘텐츠는 에픽과 몰아보기를 가능하게 한다. 에픽은 각기 다른 취향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와 다르다. 원래 드라마는 서사의 한 장르를 일컫는 것이지만 특별히 한국에서는 방송사가 제공하는 허구의 이야기 형식을 통칭해왔다. 드라마는 현실 속 시청자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적 즐거움을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 속 드라마 서사는 현실의 서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한국의 드라마가 1960년대 이래 도시화와 핵가족화, 사무직화의 경향과 일치된 소재와 주제를 일관되게 다뤄왔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미디어 환경에서는 특정 집단에게 어필하는 카타르시스가 아닌 각기 다른 취향에 입각한 자기반영적인 에픽이 중요하다. 그런 에픽은 현실을 떠난, 비록 현실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낯설게 하기’ 서사 양식이다. <하우스오브카드>, <OITNB>, <기묘한 이야기>, 그리고 한국의 <킹덤>과 <스위트 홈>은 비록 어느 정도 현실을 호명할 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세계관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픽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자연과 문화, 계절, 유행 등에 민감하지 않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서사이다. 에픽이 IP에 민감하고 트랜스미디어 콘텐츠 전략과도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몰아보기(이어보기, 다시보기, 잘라보기 등을 포함해)는 일괄출시로 인해 생겨난 시청자 주도의 텔레비전 소비양식을 지시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또한 영화적 TV(cinematic TV)로서 OTT의 에픽 콘텐츠를 대하는 수용자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원래 binge는 과잉, 중독, 게으름 등을 뜻했으나,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일괄출시하던 2013년 전후 그 의미는 미적 탐닉, 긍정적 의미의 덕후, 밤 새워 책읽기와 유사한 것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으로 텔레비전 과잉소비가 ‘껄끄러운 즐거움’(guilty pleasure)으로 간주되었던데 반해, OTT의 그것은 ‘완결의 뿌듯함’(sense of completion)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의 심리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국경에 멈춰선 OTT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OTT의 일괄출시는 공간편성을, 공간편성은 에픽을, 에픽은 몰아보기를 불러온다. OTT 플랫폼이 일괄출시와 공간편성으로 디자인된다면, OTT 콘텐츠는 그런 플랫폼과 동행하는 에픽으로 디자인되며, 수용자는 다양한 몰아보기 방식으로 그런 OTT를 즐긴다. 중요한 것은 이런 OTT의 즐거움이 국경에 따라 분리되지 않다는데 있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한국인 시청자 아무개와 멕시코인 아무개, 독일인 아무개, 우간다인 아무개가 어떤 취향의 계열로 하나로 연결된다.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누군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OTT는 국경 안에서 멈추는 미디어가 아니라 로컬과 글로벌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미디어이다. 그걸 이해한다면 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이 사극에 좀비를 입혔는지 자동으로 알게 된다.
이제 OTT 개론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적어도 이런 시각에서 OTT를 바라 봐야 비로소 무엇을 할지 보인다. OTT마저도 국경으로 제한된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한 말은 잊어도 좋다. 그렇지 않고 OTT가 글로벌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출시 전략과 편성, 콘텐츠의 서사양식과 시청 관행에서 생겨난 어떤 질적인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한다. 산업과 정책의 방향은 그런 시각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넷플릭스 국내 가입자가 순식간에 800만 명에 이르는 동안 넋 놓고 있다가 이렇게 허둥지둥 하는 이유는 이 현상의 정체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거나, 알아도 대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상의 21세기가 아니라 진짜 21세기에 적합한 텔레비전을 이야기하고 투자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