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세기의 결혼과 충격적인 이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 이후 약 2년 만의 복귀였다. 대한민국 첫 SF 대작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던 ‘승리호’는 아쉽게 넷플릭스로 선회하긴 했지만, 전 세계 영화 인기 순위 1위에 등극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로 변신한 tvN 드라마 ‘빈센조’도 새로운 장르물이라는 점에서 대중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앞서 불거진 각종 이슈들의 떠들썩함이 무색하게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을 몸소 보여줬던 배우 송중기(36)의 2021년은 당분간 청신호 일색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형 SF 블록버스터의 새 역사를 썼다”는 호평을 받은 영화 ‘승리호’에서 송중기는 승리호의 조종사 태호 역을 맡았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첫 촬영 땐 ‘최초’라는 그런 수식어가 크게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저 다른 작품처럼 평범한 작품 가운데 하나였죠. 그런데 홍보하면서 보니까 많은 기자 분들이나 관객 분들이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에 의미를 많이 부여해주셔서 새삼 여러 가지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촬영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우주 유영 신이라든지, 모션 캡처 같은 처음 하는 게 많아 신기하긴 했어요. 사실 저나 (진)선규 형, (김)태리 씨보단 (유)해진이 형이 (연기하기) 가장 어려웠을 거예요. 제일 큰 선배님도 그렇게 어려운 걸 하시는데 저희는 그저 옆에 있었을 뿐이었죠(웃음).”
2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동시 공개된 영화 ‘승리호’엔 그의 말대로 ‘최초’라는 수식어가 꼭 따라붙었다. 한국 최초의 SF블록버스터, 한국 최초의 스페이스 오페라 등등. 오랜 기간 SF 영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영화계의 첫 도전이었다. 그 ‘최초’라는 수식어의 무게에서 벗어나면, 그 다음은 ‘흥행’이 문제였다. 250억 원이란 거금이 모였어도 흥행성을 두고서는 ‘모 아니면 도’였다는 게 당시 영화계의 분위기였다.
“흥행 부담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안 없어질 것 같고….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그런 부분에 대해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배우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죠. 걱정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서 찾은 게 현장에서 최대한 그 순간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거예요. 저희로서는 (흥행보다) ‘배우들이 진짜 서로 너무 즐기면서, 잘 합이 맞아서 촬영한 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때가 제일 좋아요.”
뚜껑을 연 ‘승리호’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던 것은 역시 CG(컴퓨터 그래픽)와 VFX(시각효과)였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거대 전투 신이 벌어질 때마다 “이게 한국에서 나온 영화야?”라는 자문과 “이게 한국 영화다”라는 자답이 관객들 사이에서 이어졌다. 다만 기대하지 않은 시각적인 측면에서의 큰 성과를 거둔 것과 달리 가족이나 부성애를 자극하는 한국형 신파의 코드를 두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자조 섞인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승리호’의 시각적인 효과는 큰 호평을 받았지만 신파 코드는 국내 관객들의 비판 요소 중 하나였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그런 반응,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파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공감하기 쉬운 가족의 이야기라는 게 저로서는 더 끌렸죠. 다만 그런 반응이 있을 수 있겠다는 건 너무나도 예상했던 바고, 그런 반응을 잘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저만 해도 많은 우주 영화를 보며 자랐는데 그런 작품들은 할리우드 시스템의 전유물이었거든요. 그런데 한국 스페이스 시네마에, 한글로 ‘승리호’라고 또박또박 써있고, 태극기가 붙어있다는 시도 자체가 차별화가 아닌가 싶어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기획이잖아요. 이 기획 자체가 외국인 관객들에겐 어필 요소가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극 중 송중기가 맡은 ‘태호’는 소년병 출신으로 UTS(극 중 우주 개발 기업의 이름)의 기동대장까지 오른 독종이었지만, 자신이 학살한 밀입국자 가운데 ‘순이’라는 갓난아기를 구출해 냈다는 이유로 UTS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우주를 떠돌다 한순간에 벌어진 우주 쓰레기 충돌 사고로 순이를 잃게 되고, 궤도에서 이탈하기 전에 순이의 시신이라도 거둬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인물이다.
송중기는 유독 태호의 모습을 두고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2월 2일 열린 온라인 프레스 컨퍼런스에서도 “당시 촬영할 때 송중기의 마음과 태호의 마음이 ‘자포자기’ 상태로 정체돼 있다는 점이 비슷했던 것 같다”고 언급했었다.
“저도 아마 지금 제 곁에 순이처럼 소중한 뭔가가 있다면 태호와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만큼 순이는 태호에게 전부를 차지하는 존재였고, 실제 그런 상황이었다면 저도 그랬겠죠. 감독님이 그려주신 태호라는 캐릭터가 저와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제게 (역할을) 주셨는진 잘 모르겠지만(웃음). 그래서 공감도 되게 쉬웠고, 작품 선택 결정이 더 빠르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송중기가 맡은 태호는 극 중 우주 개척 시대를 선도한 UTS의 회장 제임스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과 이어지는 장면이 많다. 같은 국적의 크루들 이야기는 다른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됐으니 리처드 아미티지와 함께한 이야기들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리처드 아미티지는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도 영화 ‘호빗’ 시리즈의 드워프 왕자, 참나무방패 소린 역으로 친숙한 영국의 국민 배우다.
사극부터 현대극, 판타지, 스페이스 시네마까지 송중기의 필모그래피는 한층 더 풍부해졌다. 사진=영화 ‘승리호’ 스틸컷
“저도 ‘호빗’이란 영화에서 소린 왕자 역할을 너무나도 흥미롭게 봤어요. 워낙 유명한 배우라서 잘 알고 있기도 했고요. 또 예전에 영국 드라마 ‘남과 북’을 본 적이 있어 ‘우와, 거기에 나오신 분과 함께하네’라는 생각에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리고 촬영장에서 인상적이었던 게 제가 극 중에서 설리반을 오랜만에 승리호 갑판에서 만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현장에서 제가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동선을 바꾼 적이 있어요.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이래도 되나, 어떻게 생각하시냐 그랬더니 저한테 ‘컴 온!’ 그러더라고요. 그냥 ‘뭐든지 하면 형이 받아줄게’ 그런 의미로 느껴졌어요. 할리우드 배우여서 굉장히 어려운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아, 배우들 다 똑같구나, 다 서로 배려심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인상적이었죠.”
사극부터 판타지, 할리우드 배우와 함께한 스페이스 시네마에 이르기까지 송중기의 필모그래피는 시대와 장르별로 따져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풍성해졌다. 이 정도 되는 필모그래피를 갖춘 배우도 캐릭터 욕심을 낼까. 답을 알고 묻는 질문이었지만 송중기는 예상대로 “당연히 욕심이 난다”고 답했다.
“캐릭터로는 진짜 감사하게도, 제가 하고 싶은 걸 많이 이룬 것 같아요. ‘쌍화점’ 데뷔 때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같은 판타지도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조성희 감독님 덕에 했고, 이런 스페이스 시네마도 또 하게 됐죠. 그런 의미에서 조성희 감독님은 제게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는 분이에요(웃음). 그리고 제가 워낙 사극을 좋아해서 많이 한 것 같은데 제 팬들은 그만 좀 하라 그러더라고요(웃음). 욕심이 끝도 없다 보니 요즘은 굉장히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되게 어둡고 음침하고 음습한 스파이물 같은 걸 해 보고 싶단 생각이 간절하죠.”
2008년 데뷔작 ‘쌍화점’에서 송중기는 대사가 한 마디뿐인 단역에 불과했다. 인기 배우 반열에 들고 나서도 늘 ‘쌍화점’ 출연 당시의 이야기가 인터뷰마다 언급되기도 했다. 송중기는 “그때는 대사 한 마디로도 정말 감격했는데, 나중에 대사가 여섯 마디로 늘었더라. 열심히 하니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쌍화점’ 출연 당시의 이런 마음가짐을 늘 새기고 있다고 하도 이야기하다 보니 그의 주변 사람들도 이 말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가짐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송중기의 ‘롱 런’의 비결이지 않을까.
“그러니까요. 그 말 괜히 했어요(웃음). 이제 많은 사람이 그 얘길 알아서, 저도 사람인지라 게을러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놀려요. 진짜 괜히 한 것 같은데(웃음). 사실 절박함으로 따진다면 당연히 그때가 최고로 컸죠. 그때의 마음을 계속 다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하길 잘했네요. 그걸 알아야 다른 사람들이 제가 게을러지면 다독여줄 테니까. 얘기 잘한 것 같아요. 흔히 어른들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잖아요.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그렇고요.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한다면, 솔직하게 저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