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매혹된 소년이 있었다. 대서양 해안가에 폭풍우가 극심한 날이면, 거센 바닷물이 그의 집 현관문을 때려부수고 집안으로 쳐들어와 넘실댔다. 그래도 바닷가의 작은 소년은 마냥 신이 났다. 바다의 웅대한 영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년은 바다에 뛰어들어 온 몸으로 바다를 느끼는 걸 좋아했다. 그에겐 다이빙이 최고의 취미였다. 그의 이름은 크레이그 포스터(Craig Foster).
세월은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최고의 취미였던 다이빙은 끊었다. 일만 했다.
그렇게 18년이 흘렀다. 그는 점점 지쳐갔고 불면증이 시작됐다. 몸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 일해야 했지만, 일하기 힘들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이 본업인데 카메라나 편집실을 쳐다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지긋지긋했다. 업무 영역뿐 아니라 감정 영역에서도 그는 무너졌다. 아들, 아내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암울한 나날들이 끝도 없이 지속되었다.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어디서도 위로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되돌아갈 곳이 어딘지 직감했다. 바다!
그리고 바다 어딘가에서 크레이그는 암컷 문어 한 마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 문어에게서 깊은 위로를 받는다. 그 위로의 기승전결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문어 선생님>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인간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똑똑하고 야무지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문어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물론 이 문어로 말할 것 같으면, 딱히 위로를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문어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을 줄 뿐이다. 답답한 코로나19시대, 설을 앞두고 가족모임마저 자제해야 하는 요즘, 가슴 뭉클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추천한다. 상영시간은 1시간 25분.
크레이크가 만난 영리한 문어
▲ 영화 포스터: <나의 문어 선생님> ⓒ 넷플릭스
문어의 지능은 제법 높은 편이라고 한다. 어떤 생물학자는 '앉아, 엎드려, 기다려'라는 명령어를 알아듣고 실행할 수 있는 강아지 수준으로 추론한다. 크레이그가 만난 문어도 영리한 문어였다.
다시마숲 인근의 작고 납작한 동굴에서 살고 있던 문어는 처음엔 크레이그를 경계했다. 크레이그가 쳐다보고 있을 땐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날 크레이그를 관찰하며 그가 위험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문어는 그에게 빨판 가득한 손을 쭉 뻗는다. 마치 '이 인간은 믿어도 돼'라고 결론을 내린 것처럼.
그날 이후 크레이그는 문어를 가까이에서 계속 관찰할 수 있었다. 문어는 머리를 써서 사냥을 했다. 무턱대고 사냥감을 뒤쫓는 법이 없었다. 지능과 기술로 크랩과 랍스타 사냥에 성공해 즐겁게 식사하는 문어를 보며 크레이그는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어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문어의 상위 포식자(파자마 상어)가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크레이그는 파자마 상어를 선제공격해 문어를 구해주고 싶었다. 그러다 멈칫했다.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대의를 생각한 것이다. 그날 문어는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 납작한 굴 속에 피신했지만 치명적 상처를 입고 말았다. 파자마 상어가 문어의 손(혹은 다리) 하나를 뚝 끊어서 먹어버린 것이다.
어째서 문어를 보호하지 않고 카메라만 들고 있는지, 크레이그가 조금 못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파자마 상어 앞에선 가련한 사냥감이지만, 앞서 게와 바닷가재를 잡아먹을 때 문어는 위풍당당 포식자였다. 만일 인간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끼어든다면 언제 누구를 어떻게 구해주는 방식이어야 할까?
다음 순간 크레이그는 상처 입은 문어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또한 실행하지 않았다. '생태계 안에서 야생동물은 언제나 독립적으로 제 삶을 살아간다'는 대자연의 섭리를 상기하며, 꾹 참고 인내했다. 결국 문어는 스스로 상처를 돌보더니, 마침내 재활에 성공했다. 잘려 나간 부위에서 새 손이 자라났다. 마침내 크레이그는 문어가 말 그대로 문어답게 위기와 고통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일상에 복귀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완전히 회복한 문어는 예전처럼 활발해졌다. 또다시 파자마 상어가 뒤를 쫓아오자 문어는 흡입력 좋은 빨판을 활용해 주변의 전복과 조개 껍데기들을 삽시간에 주워모아 갑옷과 투구인 양 뒤집어써서 온몸을 가렸다(아래 영화 속 한 장면 참조). 그러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자 바닷물 바깥으로 잠깐 튀어나오는 과감한 행동을 단행하기도 했다. 황급히 바닷물 속으로 되돌아가긴 했지만.
▲ 영화의 한 장면: <나의 문어 선생님> 각종 어패류의 껍데기를 끌어모아 위장한 문어의 모습.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어의 팔 한짝이 보인다. ⓒ 넷플릭스
'죽음 준비'의 첫걸음
문어는 다른 물고기들과 장난을 치며 놀기도 했다. 물고기들의 호응에 발맞춰 문어가 춤추듯 뛰노는 장면 아래로 부드러운 배경음악이 깔린다. 음악도 예쁘고 문어도 예뻐서, 보는 이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 물고기들과 즐겁게 놀던 문어는 문득 크레이그에게 다가왔다. 크레이그가 문어를 쓰다듬었다. 문어는 그 손길을 느끼는 듯 얌전히 있다. 문어가 이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동물이었던가. 가슴이 따뜻해진다.
둘이 만난 지 324일째, 암컷 문어는 수컷 문어를 만나 짝짓기에 들어갔다. 크레이그는 두려움과 아쉬움을 느꼈다. 문어의 짝짓기는 말하자면 '죽음 준비'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짝짓기를 마친 암컷 문어는 수십만 마리의 알을 낳더니, 그날부터 그들을 돌보는 일상을 시작했다. 사냥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놀지도 않았다. 크레이그와 인사하지도 않았다. 문어라는 종(species)의 탄생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전통의 실천이었다.
이때, 파자마 상어가 다시 등장한다. 파자마 상어는 저항과 도피의 의지를 상실한 채 호흡만 겨우 붙어 있는 바싹 마른 암컷 문어를 입에 물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번에도 크레이그는 문어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별이 정말 슬프고 죽음이 몹시 아쉬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크레이그는 문어를 보내주었다. 떠나가는 문어의 마지막 모습을 (마치 경건한 장례식 영상을 기록하듯) 카메라에 소중히 담았다.
그렇게 문어는 떠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그 문어를 '선생님'으로 부른다. 그는 문어의 곁에서 일상을 나누며 문어와 살갑게 교감하는 동안, 사랑할지라도 상대의 삶에 불필요하게 개입, 간섭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존중하는 삶임을 배웠다고 회상한다. 자기가 받은 생명의 몫을 자기답게 감당한다는 것의 의미와 무게 또한 배웠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문어를 자랑스러워했다. 문어가 자기 삶을 충실히 살고 있음을 매 순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크레이그는 문어를 통해 깊은 위로를 받았고, 치유를 경험했다. 이제 그는 한동안 서먹했던 아들과 함께 다이빙을 즐긴다. 부자관계가 회복되어가는 것이다. 또, 그는 동료들과 연대하여 다시마숲을 지키는 활동도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는 모두 지친 상태다. 주춤했다가도 금방 다시 늘어나는 확진자 현황을 볼 때면 예전 크레이그처럼 무거운 좌절감, 어두운 울적함에 빠져든다.
그런 우리를 누가 위로해줄까? 예측컨대, 크레이그가 그랬듯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애교 만점에 똘똘하기까지 한 문어를 새롭게 발견해 더 이상 '문어숙회'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