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승리호>포스터 ⓒ 넷플릭스
한국 최초의 SF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승리호>는 팬데믹의 영향 속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극장용 영화임에도 이례적으로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스크린에 걸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눈물을 머금고 OTT 서비스로의 전환은 모험이다. 하지만 OTT 서비스 성격상 언제 어디서나 두 번 세 번 재관람할 수 있다는 것과 전 세계로 송출된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 맞고 틀린 지는 아직 실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승리호>는 나라와 민족의 경계가 모호해진 미래에 지구 밖에서 한국인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생각한 끝에 나온 영화다. 인공위성 및 비행체 파편으로 거대 쓰레기장이 된 우주에서 이를 수거하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란 발상이다. 어쩔 수 없이 마블 스튜디오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비교 대상이 되지만,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한국인이라니 우주의 질서에 한 발자국 다가간 것만 같다.
그동안 수많은 히어로 영화에서는 남성 백인이 지구를 지키고 나아가 우주까지 수호했다. 최근에서야 <원더우먼>이나 <블랙 팬서>처럼 성(性)과 인종 다양화를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아시아 히어로의 활약은 전무했다. 물론 개봉 예정인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더 텐 링스>나 <이터널스>가 있기는 아직 아시아 히어로는 낯선 존재다.
▲ 영화 <승리호> 스틸컷 ⓒ 넷플릭스
조성희 감독은 "오리지널 국산 히어로가 있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이 사소한 물음으로 영화 작업에 돌입했고, 승리호라는 이름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승리호>의 매력은 다분히 '한국적인 것'에 있다. 익숙해서 잘 몰랐던 우리만의 생활과 문화가 우주선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된장찌개와 김치, 콩자반, 계란 프라이가 밥상에 오른다. 현금 대신 쌀을 현물로 건네고 한국 어린이는 한글을 배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목돈 마련 대책 '계'도 등장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장면들이 미래에도 존재한다면 어떨까. 꽤나 어울리는 한국적 스페이스 오페라다.
조성희 감독은 단편 <남매의 집>을 시작해, 장편 <짐승의 끝>을 지나 첫 상업영화 <늑대소년>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후 두 번째 상업영화로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을 만들었다. 첫 단편 <남매의 집>과 첫 장편<짐승의 끝>은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서 구체적인 시대적·공간적 배경없이 꾸렸다. 외계에서 온 건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말투를 쓰는 괴한, 신인지 악마인지 구별되지 않는 존재를 통해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만들어 간다.
<늑대소년>에서 과학으로 만들어진 생명체 늑대소년을 등장시켜 소녀만의 히어로를 만들어 낸 바 있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고전 히어로 홍길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장르적 쾌감과 재미, 따스한 감동까지 두루 갖추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240억 원이라는 기념비적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한국 최초 스페이스 오페라 <승리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폐허가 된 지구, 돈이 없어 화성으로 이주할 수 없는 미래 <승리호>가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전작에서부터 이어져 온 '아이로 이룰 희망'이다. 영화<승리호>는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버리고 화성이 새 식민 행성이 된 2092년을 배경으로 한다. 이름하여 UTS. 돈 있는 일부 계층만 이주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급 사회다. 돈 없는 하층민은 오염된 지구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야 한다. 인류 이주를 주도하는 것은 정부도 군도 아닌 기업이다. 설리반 박사(리차드 아미티지)는 지구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하며 화성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한편,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하는 장선장(김태리), 태호(송중기),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는 손발이 척척 맞는 우주 청소부다. 전 세계인들이 우주 쓰레기를 수거해 살아가는데 그중에서도 승리호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해적단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 우주정을 수거하던 승리호는 설리번 박사가 대량 살상무기라고 말한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다. 곧 터질 것이라는 경고와 달리 꽃님(박예린)이란 이름의 귀엽고 천진난만한 모습의 아이다. 이때부터 승리호 선원들은 갈등한다. 허덕이는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현상금과 맞바꿀 것인가, 보호할 것인가. 지구를 파괴하고 새로운 지구를 만들려는 세력과 지구의 마지막 희망인 꽃님이를 두고 한판 대결을 벌인다.
▲ 영화 <승리호> 스틸컷 ⓒ 넷플릭스
조성희 감독의 전작 영화를 훑어보면 순박한 이름의 아이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이, 순자, 순영, 말순 등 유독 '순'자 돌림의 소녀가 등장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단연 꽃님과 순이다. 꽃님을 탐하려는 세력에 맞서 선원들은 죽음을 불사한다. 꽃님의 영어 이름은 '도로시'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이 떠오르는 업동이까지 있으니,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로 마법 세계로 가게 된 도로시의 모험과 교차한다.
<승리호>는 비주얼 부분에서 합격이다. 조성희 감독 영화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잠시 접어두고 상업영화 장르에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황무지 같았던 한국 영화의 SF 장르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의 높은 수준을 보인다. OTT가 아니라 애초에 극장에서 개봉할 포맷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오히려 작은 화면에서 보는 답답함을 느꼈다. 큰 화면에서 본다면 오락성이 극대화되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이야기는 간결해지고 평범함을 택했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첫술에 배부르랴 싶지만<승리호>라는 첫 주자가 한국영화 다양화에 기여한 성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승리호>를 필두로 상상력과 자본력이 결합한 다양한 한국형 SF가 나오길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