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5
현상
2020년 9월 11일. 넷플릭스 전 세계 영화 순위 1위에 한국 영화 ‘살아있다'가 올라섰다. 한국 드라마 및 영화 콘텐츠 중 최초로 벌어진 일이었다. 2020년 12월 25일 넷플릭스 TV 프로그램 전 세계 3위, 미국 3위를 기록한 ‘스위트홈’은 한국 드라마 최초로 미국 TV 프로그램 Top10에 진입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21년 2월 7일 넷플릭스 영화 전 세계 1위에 ‘승리호'가 올라섰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세 편의 영화, TV Show가 모두 한국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털리고, 발가벗겨졌다는 점에 있다. 이런 사례는 당연히 과거에도 있었다. 전설의 SF 명장 ‘디 워'를 필두로 ‘해운대’, ‘국제시장', ‘신과함께', ‘7번방의 선물' 등은 평가에 있어서만큼은 4번째 다운당했던 홍수환 얼굴만큼이나 망가져 있었지만 모두 수백만에서 1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5기(흥행)에 성공했다.
과거에는 소위 한국적 ‘신파’가 밖에 내놓기 좀 창피한 어떤 것이고 ‘막장'이 우리 고유의 어떤 치부와도 같은 정서라고 생각했기에 소위 ‘한국적 특수성'에 기반한 남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내놓는 한국 콘텐츠의 성과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적 신파', ‘한국적 막장'이란 것이 기실 세계 공통의 정서였다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경험
영화 전문 채널을 돌리다가 ‘아마겟돈’, ‘인디펜던스데이', ‘2012’ 같은 영화들을 넋 놓고 보고 있는 자신을 가끔 발견한다. “어머어머!”, “저게 말이 되니?”를 외치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못했던 우리 모친의 아침 드라마 시청을 타박했던 나다.
미혼모일 때 낳고 입양 보냈던 딸이 내 아들과 결혼하려고 하고 아빠 애인의 아들이 나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부럽지 않은 한국 막장 월드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친이나 뜬금없이 대통령이 전투기 조종간을 잡는다던가, 사랑하는 딸의 남자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파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나나 도긴개긴이었다는 사실은 명색이 영화 글을 20년 가까이 써온 나로서도 좀 창피한 부분이다. 아니 창피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의 근친을 훔쳐본 콤플렉스' 같은 느낌으로서 말이다.
이는 ‘키노'(1995년부터 2003년까지 발행되던 영화 평론잡지. 읽다 보면 발터 벤야민이 옆집 아저씨가 되고 들뢰즈가 사촌 동생쯤 되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사대적 영화 이데올로기 제조의 총본산. 농담이지만 뼈는 있다)류의 잡지에서 학습된 창피함이다. 영화를 오락으로서 소비하지 못하고 문화자본의 한 축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일종의 계급적 방어기제로써 사용한 결과다.
간극
평론가의 평점과 관람객의 평점이 갈리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김자홍이 엄마와 만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울었지만 평론가는 코웃음을 쳤고(신과함께), 비장하게 헬멧을 쓰며 전투기에 탑승하는 대통령을 보며 미국인들은 국뽕에 차올랐지만 헐리웃 비평가 협회는 비웃음을 날렸다(인디펜던스 데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영화는 어떤 지점에 눈물과 웃음 버튼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신과함께-죄와 벌>
영화에서 그 유혹은 사뭇 강렬하다 못해 반드시 눌러야 하는 ‘상업적 장치'이다. 평론가는 그 장치를 해부하며 만듦새를 평가한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타르코프스키 희생처럼 만들어질 수는 없다. 현존 한국 최고 모델 혜박이라도 매일 오뜨꾸뛰르 런 어웨이 의상을 입고 장보러 나가지 않는다. 작정하고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 있고 작정하고 울리고 싶은 작품이 있다. 예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작품에게는 예술적 평가를, 아침 조깅을 해야 할 때는 그에 맞는 복장이 필요하듯이 평가도 의도에 맞는 글이 나와야 한다.
관객이 거의 평론가인 한국에서는 하도 글이 많으니 형용사가 모자를 지경이다. 200만 년 전 프랑스 동굴벽화도 가져오고, 발터 벤야민도 가져오고, 들뢰즈와 라캉도 막 가져오는 이유다. ‘스타워즈’ 세계관의 핍진성이 R2D2의 대화 내용에 묻었느니 안묻었느니가 관객에게 중요한 요소 아니다. ‘캡틴 마블’에 PC(politically correct)가 묻었는지 안묻었는지 관객은 별 관심이 없다. 영화의 원래 소비와는 크게 관련 없는 동떨어짐이 생겨난다.
반면
잘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초면에 나의 직업을 물어보는 경우가 잦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다큐멘터리 연출을 했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나 다큐 완전 좋아하는데!”라고 말한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뭘 좋아하시는데요?”라고 묻지 않는다. 아홉에 여덟은 ‘인간극장이요!”라고 말할테니까.
옆집 똥개 복돌이와 마당 건너에 있는 전봇대까지 의인화해 감정을 입히는 이금희 누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복돌이가 주인을 만나 마냥 신나하는 눈치나 마당 건너 가로등이 영숙이의 마음까지 비추고 있는지 우리는 알 필요 없다.
이는 사실과 실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여야 하는 다큐멘터리 속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인간극장’은 그런 면에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고 내가 아무리 외쳐봐야 모두는 ‘인간극장'을 다큐멘터리로 안다. 내가 아무리 주장해도, 평론가가 아무리 이 영화 올바르지 않다고 말해도 관객이 원하는 콘텐츠의 소구방향은 정해져 있다.
구별
어려운 사람 하나 끌어와보자. 브르디외 형님. 이 형님이 말한 ‘구별짓기'에서 중심 개념인 문화자본은 학위, 입상, 능력, 선별력 등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는 지표로 쓰이고 계급 간의 구별과 불평등의 영속화를 꾀한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일련의 괴리들은 이 문화자본의 구별짓기에 의해서 태어났다.
‘아마겟돈'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침드라마 시청 중인 모친, ‘캡틴 아메리카’(국내 개봉명 : 퍼스트 어벤져)나 ‘토르'의 한심한 네러티브는 참아주면서 ‘승리호'의 어설픔은 참을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설정한 계급 안에 올라가고 싶은 인정욕구를 비판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단순하게 반복되는 고된 일상의 노동 속에서 아침 드라마의 막장행각을 보며 감정의 탈출구를 찾는 엄마도, 국제시장을 보면서 과거의 영광을 조ㅊ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그러나 지금은 태극기 할배가 되어버린 광부도, 리브 테일러가 너무 예뻐서 넋 놓고 아마겟돈을 돌려보는 나도 좋은 콘텐츠가 어떤 콘텐츠인지는 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분주하게 아침밥 차려놓고 다들 출근 시킨 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즈 셧'이나 이창동의 ‘밀양'을 틀어놓고 어젯밤 남편과 싸웠던 화를 삭이는 엄마는 없다. 짤릴일 없는 상사에게 시달리고 지친 마음으로 밤늦게 귀가해 “오늘은 너무 힘드니까 ‘시민 케인'이나 ‘전함 포템킨'을 봐야겠어.”하는 직장인도 없다.
팝콘무비, 소프오페라, 텔레노벨라가 나오는 이유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잣대로 저급문화, 하위문화를 구별짓고 멸시하는 것. 브르디외 형님이 말했던 구별짓기이고 계급을 나누고 올라서고 싶은 인정욕구다.
그래서
승리호는 ‘기념비적’으로 아쉽다. 이야기 구조의 아쉬움도 있고 인정욕구의 희생양으로 까여서 생기는 아쉬움도 있다. 코웃음도 안 나오는 스타워즈의 유치한 설정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장르 시조새로서 숭앙 받기에 승리호의 박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더 아쉽다. 김태리가 주연이기에 더 그렇다.
그에 반해 한국만의 클리셰인 “빵구난 양말"과 “방귀"를 전 세계적으로 각인시킨 점은 칭찬해주고 싶다. 이거 10년 내에 오마주 나온다. 리처드 아미티지를 부감으로 찍어서(게다가 거인으로) ‘호빗'의 소린을 티나지 않게 내세운 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꽤 즐거운 숨은 그림 찾기였다. 승리호는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제공했고 성공했다.
본격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무엇보다 오락영화로서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었다. 평가는 관객들의 실질적 감상과 토대 위에서 벌어져야 한다. ‘한국식 신파'가 세계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어필이 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고 ‘수준 낮은 대사와 구성'이란 게 누구의 기준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들은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 초기의 ‘토르'나 ‘캡틴 아메리카'를 보았을 때 자기의 평가와 견주어보아야 한다. 다른 관점이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인색해지는 문제는 2003년 총수가 쓴 글이 있으니 그것도 한 번 읽고 오는 것이 좋겠다.
강국
2002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축구 강국이 되었다. 2021년 문화 강국으로서 한국은 전 세계에 증거를 내놓고 있다. 신파 때문에, 개연성 때문에, 송중기 때문에 안 보겠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무엇보다 김태리의 젊었을 적 출연작이다. 우리가 폄훼하는 것처럼 우리 영화나 문화가 저급하지 않다. 한국이라는 좁은 틀에서 계급적 권위 갖지 말고 세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답은 나온다.
‘스위트홈’이, ‘살아있다’가, ‘승리호'가 대단한 예술영화 아니다. 대단한 예술은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홍상수 감독 같은 작가적 감독에게 들이대야 할 잣대다. 오락영화는 오락영화의 역할이 있다. 창피해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적 신파'가 세계를 뚜까 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