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2.14 08:15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조성희 감독은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 감독입니다. 그 세계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는 바로 동화(童話)적 감각이지요. 순수하고 용감한 아이의 마음으로 조각된 세계관에 관객들은 쉽게 동화합니다. 그 이유는 장르의 클리셰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흔한 듯 보이지만 진부하지 않은 서사를 구축해내는 조성희 감독 특유의 장기에 기인하지요.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승리호>에서는 그의 장기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메인 플롯과 불화하는 부성애의 작위적 신파, 지나치게 도식적이며 설명적인 플래시백, 외국인 연기자들의 어색한 연기 등이 우선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의 단점들입니다. 여기서는 영화의 서사적 결함 중 하나인 악인(惡人)을 활용하는 방식에 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뛰어난 장르영화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틀 안에서 소위 ‘징벌되는 악’을 굉장히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일과 맥이 닿아있는데, 장르영화에서 악인의 형상과 존재감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지요. 그러니까 선인과 악인의 흥미로운 캐릭터 구도와 그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 및 해소 과정이 장르영화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조성희 감독, 영화 <승리호> 스틸컷
<승리호>는 승리호의 선원들로 대변되는 선인들과 우주개발기업 UTS(Utopia Above The Sky)의 조직원들로 대변되는 악인들의 대결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습니다. UTS의 수장인 ‘설리반’(브레인 온 파이어)은 감독이 말한 대로 “우주 시대를 개척하고, 영생의 비밀을 풀고, 화성 테라포밍에 성공해 인류에 기여한 부분”(<씨네21>, ‘조성희 감독이 직접 밝힌 ‘승리호’의 스토리 비하인드’)이 있는 인물입니다. 마냥 악인은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의문점은 감독이 바라는 대로 그런 부분이 영화에 잘 녹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악인은 선인을 무너뜨리는 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악인이 왜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까지 선인의 파멸에 전력을 다하는지 충실히 묘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인은 적어도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영웅으로 군림할 수 있으며 관객 역시 악인의 행위에 당위성을 느끼고, 그의 패배에 일말의 아픔과 연민을 갖게 되지요. 관객의 지지를 받는 매력적인 악인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탄생합니다.
조성희 감독은 전작들에서 선인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데엔 발군의 실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본격 장르영화라 할 수 있는 <늑대소년>(2012)에서 ‘늑대소년’(송중기)과 ‘순이’(박보영)는 저마다의 개성이 확실했고, 그들의 감정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이미지화됩니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에서 ‘홍길동’(이제훈)은 선과 악이 묘한 교집합을 이루는 흥미로운 캐릭터였고, ‘말순’(김하나)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지요.
<승리호>도 그렇습니다. (영화 속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가난하고, 뻔뻔하고, 못돼먹은 ‘태호’(송중기)와 머리는 똑똑한데 성질이 아주 거지같은 ‘장선장’(김태리).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따뜻한 마음을 지닌 ‘타이거 박’(진선규)과 발랄한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유해진). 그리고 승리호의 마스코트 ‘꽃님이’(박예린)까지. 하나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이죠.
이에 반해 조성희 감독의 영화들에서 악인들은 문자 그대로 ‘악한 사람’으로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늑대소년>의 ‘지태’(유연석)와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강성일’(김성균)이 그러한데, 특히 지태는 전후맥락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영화 내에서 시종일관 도구화되다가 마지막에 가서 무의미하게 삭제됩니다.
<승리호>의 설리반도 이와 유사하게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측면이 있어요. 인류의 생존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 그가 왜 지구를 멸망하려하고, 승리호를 제거해야만 하는지가 영화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 설리반에 맞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승리호의 캐릭터들조차 서사에 흡수되지 못하고 극중에 등장하는 우주쓰레기처럼 어수선하고 야단스러운 느낌만 주는 거지요.
<승리호>가 우주 공간을 종횡무진 누비며 박진감 넘치는 활강의 이미지를 구현함에도 불구하고 서사적으로 어떠한 긴장감이나 폭발력도 선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악인의 존재감이 미미하고 평면적으로 형상화된 탓이 큽니다. 승리의 서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송석주 기자 ssj@reader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