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 김태리는 왜 영웅문을 보고 있었을까?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21.02.13 10:00
'승리호' 김태리 스틸.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뒤 연일 반응이 뜨겁다. '승리호'는 2092년, 우주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 후 위험한 거래에 뛰어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조성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송중기와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 등이 호흡을 맞췄다.
당초 지난해 극장에서 개봉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결국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하는 것으로 합의돼 지난 2월5일 공개됐다.
'승리호'가 공개된 뒤 영화 속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예컨대, 김태리가 맡은 장선장은 왜 '영웅문'을 보고 있을까? 김용의 대표작 중 '영웅문'을, 그것도 1부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2092년에 종이책으로.
영화 말미에 업동이는 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과 노래'를 읽고 있을까? 로봇이 삶을 찬양하는 시집을 읽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리하여 업동이는 트랜스젠더 로봇인가?
궁금증을 조성희 감독에게 물었다.
조성희 감독은 "장선장이 종이책을, 그리고 무협지를 읽었으면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선장이 그 책을 읽는 게 의미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들 중 대의를 가진 건 장선장 캐릭터 뿐이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선장은 '영웅문' 1부의 주인공 중 남자인 곽정이란 영웅과 닮았을까, 여자인 황용과 닮았을까. '영웅문'을 읽은 독자라면, 장선장이 곽정보다는 황용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을 터. 이에 대해 조성희 감독은 "'영웅문' 내용 자체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며 "종이책, 무협지, 제목에 크게 써있는 영웅이라는 글자가 중요했다. 장선장이 그 책을 들고 있는 것이 묘한 분위기를 풍길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업동이가 '삶과 노래'를 읽고 있는 장면은, 사실 급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조성희 감독은 "업동이는 원래 지붕에서 다른 일을 하는 설정이었는데, 촬영 전날 그것보다 시집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표지를 헐레벌떡 만들어 촬영했던 기억이 있다. 업동이가 이제 사람의 겉모습을 가졌으니 이제 내면을 채우는 데 관심이 있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로봇인 업동이의 젠더에 대해선 조성희 감독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업동이라면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업동이가 남성형에서 여성형을 추구하는 트랜스젠더 성향을 갖고있는지, 아니면 로봇에겐 젠더가 무의미 하지만 여성형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업동이가 화투를 치는 장면은, 업동이를 맡은 유해진이 영화 '타짜'에 출연했던 걸 기억한다면 재미가 더 할 법하다. 조성희 감독은 "우리나라 영화 속에서 화투를 치는 장면이 나오면 '타짜'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며 "여러 번 본 영화인 만큼 그 영화의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드리워져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무한도전' 팬이라면, '승리호'에서 태호(송중기)가 "밤길 조심해라, 누가 때리면 나인 줄 알아"라고 한 대사가 반가울 터. 박명수가 '무한도전'에서 말해서 유명해진 유행어이자 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조성희 감독은 "평소 '무한도전'을 즐겨 본다"면서 "의도했다기보다는 무의식 중에 박명수의 유행어를 썼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박명수가 좋아할지, 호통을 칠지는 미지수다.
'승리호'는 조성희 감독이 영화아카데미 시절 장편 제작 연구 과정 중에 썼던 트리트먼트에서 출발했다. 제작사 비단길 김수진 대표는 12년 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데뷔도 못 한 신인감독이 당시 돈으로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갈 법한 영화를 덜컥 하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조성희 감독은 "사리분간을 못 했던 시절이라 그냥 하면 될 줄 알고 (김수진 대표에게) 보여줬다. 미스터리인 게 대표님이 해보자고 했었다.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승리호'는 조성희 감독이 '늑대소년'을 내놓기 전부터 준비를 했고, '늑대소년' 이후에 '우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기획됐었다. 물론 그때도 여러 여건상 제작이 어려워 무산됐고, 조성희 감독은 '탐정 홍길동'을 차기작으로 선보였다.
'탐정 홍길동'이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겐 외면받았기에, '승리호' 제작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김수진 대표와 조성희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투자도 쉽지 않았고, 진행도 여의치 않았다. '태양의 후예'로 한류스타로 거듭난 송중기가 합류를 결정하면서 비로소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투자가 되고, 제작에 들어가기까지는 산 너머 산이었다.
24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를,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을 같이 한 CJ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신규 투자배급사인 메리크리스마스가 했다는 건, 준비 과정이 그만큼 녹록치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간난신고 끝에 만들어진 '승리호'가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를 통해 보게 된 것도 못내 아쉽다. '승리호'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봤으면 더욱 재미를 느꼈을 영화인 탓이다. 그것도 '승리호'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조성희 감독은 '승리호'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감사한 듯하다. 어찌 아쉬움이 없을 수 있겠냐마는 그는 "행운처럼 진행이 돼서 영화를 만들었다"며 "극장이든, 컴퓨터든, TV이든, 어떤 식으로든 하루빨리 관객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기에 12년 동안 품었던 꿈이 세상에 선보여질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