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리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한국 최초 우주 SF 영화 <승리호>(감독 조성희)가 지난 5일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여러 반응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인 국가가 있었다. 멕시코였다.
멕시코 언론이 전하는 <승리호> 관련 기사에는 한 인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기동대장 ‘카밀라’ 역을 맡은 카를라 아빌라(28)다. 카밀라는 영화 속 ‘빌런(악당)’ 중 하나로, 도로시(박예린)와 승리호 선원들을 집요하게 추격하는 인물이다. 특히 영화 후반부 타이거 박(진선규)과의 강렬한 액션신으로 대중에 눈도장을 찍었다. 카밀라의 ‘본캐’ 카를라는 한국 생활 5년 차 모델 겸 배우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의 궁전> <청춘기록> <으라차차 와이키키> 등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은 있지만, 대중에게 각인될 만큼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건 <승리호>가 처음이다.
“해냈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만난 카를라는 소감을 묻자 이렇게 외쳤다. 그는 “카밀라와 성격이 정반대여서 정말 힘들었다”며 “영화가 공개된 후엔 행복감과 비현실적인 기분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11월 E6 비자를 발급받은 후 오랜 무명으로 지내야 했던 그는 “저보다 멕시코에 있는 가족들이 더 흥분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엄마와 남동생에게 매일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쏟아진다고 하더라”며 웃어보였다. E6 비자는 한국에서 외국인이 90일 이상 장기 체류하며 방송연예, 공연, 스포츠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발급받아야 하는 비자다.
카를라는 2019년 4월 초 <승리호> 오디션을 봤다. 첫 오디션에서 영화 <라라랜드>와 <히든 피겨스>의 한 장면을 즉흥연기로 선보였다. 한 차례 더 오디션을 봤지만 “마지막까지 어떤 배역을 맡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최종 오디션에서 남자 배우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나요. 카밀라의 성별이 그때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던 듯해요. 어떤 사연을 가진 인물인지는 몰라도 민첩하고 강한 여성이란 건 직감했죠. 영화 <언더월드>의 셀린느와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를 참고했어요.”
액션 스쿨에서 약 3개월간 무술을 배웠다. 카를라는 “쿵푸와 가라데를 배운 경험이 있어서 액션 연기에 도움이 됐다”며 “그럼에도 액션 연기는 처음이라 모든 싸움의 기술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멕시코 친구들은 액션신이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실제로 우주선 조종 장면이나 액션 장면 장면 중 일부가 편집되긴 했어요. 그럼에도 저는 이런 기회가 온 것 자체로 행복했어요.”
<승리호>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멕시코 과달라하라 출생인 카를라는 지역 사립 명문대학교 ITESO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12살 때 처음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어요. 그 친구를 통해 멕시코에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에 빠진 건 고등학생 때예요. 좋아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가수 보아가 불렀거든요. 보아에게 빠져서 K팝을 알게 됐어요. 그땐 지금처럼 K팝이나 한국드라마 인기가 많지 않았어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카를라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2017년 고려대학교 ‘국제정치학과’와 ‘언어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장학생 선발에서 탈락하면서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만 했죠. 이후엔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어요. 식당, 술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고요. 모델 일도 종종 했어요.”
연기도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다. “친구 소개로 <알함브라의 궁전> 엑스트라 일을 하게 됐어요. 배경이 스페인이라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거요. 그렇게 드라마 단역 아르바이트를 한 뒤 본격적으로 배우 일을 하고 싶어서 E6 비자를 발급 받았어요.”
오랜 시간 동경했던 한국 연예 산업은 마냥 장밋빛은 아니었다. 마른 몸을 선호하는 업계의 끊임없는 지적에 자신의 몸을 “뚱뚱하다”고 말하게 됐고, “외국인 같지 않아서” 캐스팅이 엎어지는 일도 있었다. “영화 오디션이었는데, 당시 제 머리가 검은색이었어요. 금발의 외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캐스팅이 번복됐죠. ‘머리 색을 바꿔 보면 어때?’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외국인 같지 않다’라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됐어요. 외국인 같은 외국인이 뭘까 한참 고민했어요.”
카를라는 “그래서 더 <승리호> 출연이 값지다”고 말했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 대해선 “따뜻했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한국말이 서툴고 반말을 섞어 사용하는 버릇이 있어서 선뜻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했어요. 촬영장에서 괜히 휴대폰만 보는 척했는데 김태리 선배님이 먼저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셨어요. 한국어를 어려워한다는 걸 알고요. 마지막 촬영 땐 아쉬움에 많이 울었는데 진선규 선배님이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도 했어요.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 됐어요.” 그는 6개월의 촬영을 끝낸 뒤 감독과 동료 배우들에게 고향 과달라하라에서 생산하는 술 ‘데킬라’를 선물했다.
소속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일정을 혼자 관리하는 카를라는 요즘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중남미 지역에서 영화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아요. 다들 저를 멕시코뿐만 아니라 라틴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대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언론사 5곳과 인터뷰를 했는데 주로 송중기, 김태리 선배님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만큼 한국 콘텐츠가 인기있다는 거죠. 내일은 스페인 유명 유튜버의 스트리밍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멕시코 방송사와도 출연 일정을 조율 중이고요. 너무 신기하죠! 물론 저보단 한국 배우들에 대한 질문이 더 많지만 일이 많아져서 행복해요”
카를라는 꿈이 많다. 그는 “우선 멕시코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다”고 했다. 대사관과 연계한 멕시코인재글로벌네트워크(RGMX) 활동으로 문화 교류를 돕고 있는 그는 “멕시코에서 왔다고 하면 장난처럼 ‘마약 해봤어?’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멕시코의 모습이 어둡다 보니 생기는 편견 같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큰 목표를 덧붙였다. “열심히 노력해서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한국배우’가 되고 싶어요. 한국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 있는 어린 친구들이 좀 더 안전하게 자신의 꿈에 도전할 수 있도록 제가 길을 잘 닦고 싶어요. 단기적으론 멕시코에 있는 어머니께 집을 사드리고 싶고요. 혼자 저와 남동생을 키우면서 많은 희생을 하셨거든요. 그 사랑과 노력을 갚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