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아쉬움에도, '승리호'속 김태리가 빛난 이유
[리뷰] 또 하나의 가족 <승리호> 속 '강인한 모성'
이정희 (ama2010)
21.02.12 09:26최종업데이트21.02.12 09:26
▲ 승리호 ⓒ 넷플릭스
2020년 한국 영화의 기대작이었던 <승리호>가 지난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개봉되었다. 전세계 넷플릭스 1위라는 흥행 호조와 함께 한국적 상상력, 기술력이 보여주는 한계로 인해 엇갈린 평가가 오가는 중이다.
영화는 '지구 지킴이 자격증'을 지닌, 근사한 코스튬을 한 할리우드 초인들 대신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의 일꾼들, 즉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 대표로 지구를 구하는 멋진 순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를 위해서 엄청 빠른 속도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 쓰레기'로 가득찬 광활한 우주와 비행선으로 그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우주 노동자들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리적 기반으로 이분화된 세계를 등장시킨다. 환경 오염으로 방독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황폐화된 지구와 그런 지구에서 벗어나 위성 궤도에 우주 개발 기업 UTS에 의해 형성된, 지구인 중 5%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다. 그리고 UTS의 수장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염된 지구를 떠나 화성에 새로운 기지를 개척하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 제작진이 내세운 '신선한 상상력과 기술력'이라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그간 목격했던 다수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영화와 지구 지킴이들의 활약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내세운 기술력은 음향에서부터 CG에 이르기까지 이미 세련된 기술력을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에 눈이 높아진 관객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키기엔 다소 미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호>가 가진 미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환경 오염이 화두가 된 21세기에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구와 지구 쓰레기들이 질주하는 우주, 그곳을 종회무진 누비는 쓰레기 노동자 히어로라는 발상은 그 자체로 신선하며 통쾌하다.
또 하나의 가족
▲ 승리호 ⓒ 넷플릭스
하지만 다소 어설픈 기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승리호>라는 영화를 지탱시켜 나가고 있는 건 <늑대 소년> 이래 조성희 감독이 추구하고 있는 온기 넘치는 가족적 세계관이다.
가족적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감독이 지향하고 있는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혈연적 가족'이 아니다. 외려 감독은 그러한 기존의 질서에 기반을 둔 가족을 지양하고자 한다.
<늑대 소년>도 그렇고 <승리호>도 그렇고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건 문명화된 사회가 만들어 낸 '이종의 생물체'다. 늑대 소년은 살인 병기를 만들어 내려는 생물학적 실험의 실패작이다. <승리호>에서 늑대 소년의 역할을 하는 건 대량 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다. 물론 늑대 소년이 살상무기만이 아니듯, '도로시'에 대한 사연은 영화 초반과 다르게 풀려나간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늑대 소년과 도로시는 모두 인간의 과학 문명이 만들어 낸 '의도와 다른 결과물'이다.
그 의도와 다른 결과물이 평범한 사람들의 동네에 뚝 떨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건강이 안 좋아 시골로 요양 온 순이네 집에 나타난 늑대 소년처럼, 돈 되는 쓰레기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지만 결과는 늘 빚쟁이인 승리호에 도로시가 나타난 것이다.
경계도 해보고, 밀어내 보기도 하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들'은 인간적 온기로 이 '괴생물체'를 감싼다. <승리호>에서 도로시의 정체는 미디어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기에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대량 살상 무기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한 도로시에게 승리호의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분), 로봇 업동이(류해진 분), 장선장(김태리 분), 그리고 태호(송중기 분)는 마음을 열게 된다.
승리호 사람들은 돈 한 푼에 육탄전을 벌이는 등 사사건건 부대끼는 처지이지만 한때는 또 다른 살상 무기였던 로봇을 '업동이'라 부르고 함께할 만큼 가족적이다.
원형으로서의 모성, 장선장
▲ 승리호 ⓒ 넷플릭스
승리호 가족의 형태는 우리가 아는 그 '가족'과 다르다. 그 중심에 장선장(김태리 분)이 있다. 유일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승리호 리더십의 근원이자, 결정판이다. 설리반이 구축한, 마치 오늘날의 신자본주의 세계와 같은 소수의 가진 자들이 누리는 UTS 세계와 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노동에 기반을 둔 세계를 뒷받침하는 부도덕한 과학 기술의 실체에 저항했던 그룹의 소속원이었던 그녀는 승리호의 리더로서 세 선원을 이끈다.
<늑대 소년> 속 모성적 존재 순이가 장선장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조성희 감독은 장선장을 통해 모성에 대해, 가족에 대해 질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모성은 '핵가족'의 정착과 함께 대다수 가족 내에서 정서적 안전기지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역사를 훑다보면, 모계적 영향력이 강했던 장면 장면을 마주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혼인 후에도 오랜 기간 친정인 강릉에서 친정 가족과 함께 살았던 것을 볼 때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모계 혈통의 가족관계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성리학이 정착되고, 이후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로 이어지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위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드러난 한 면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성리학적 사회 구조가 정착된 조선에서도 여성은 '안채'의 주인으로 집안 일에 대한 전권을 행사해왔었다. 사실 '가부장적'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족들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마'의 권력이 이 꽤나 지배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 역사적 '모성'의 위상을 되새겨본다면 <승리호> 속 장선장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라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간 이면의 실세였던 '모성'을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라 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의연하게 그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우리 현대 문학의 거장이 된 이문열, 황석영, 이청준, 박완서 등의 작품 속 어머니들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 그 이상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듯이 <승리호>의 장선장은 모성적 감성 대신 총을 든다. 설리반에 맞서기 위해 마지막까지 폭탄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도로시와 자신의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다. 그리고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쓰레기 하치 위성 1호의 다른 동료들을 독려하여 '설리반'의 UTS에 맞선다.
<늑대소년>의 순이가 연약한 듯 의연했다면, <승리호>의 장선장은 말 그대로 '가장'이다. 한때 갱단 두목이었던 타이거 박도, 한때 살상무기였던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도, 최고의 킬러였던 조종사 태호도 장선장의 권위 아래 깃든다. 심지어 그녀에 반한 피에르조차 기꺼이 그녀의 리더십에 존경을 표한다.
가장으로서 장선장의 '리더십'은 할리우드 '지구 지킴이'들 중 발군의 여성 캐릭터 캡틴 마블을 넘어선다. 당대 두 최고 남녀 배우 송중기와 김태리가 출연했음에도 '남녀'로서의 케미스트리 대신 가장과 식구라는 대안적 가족 관계로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은 <승리호>. 그래서 싱거웠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디선가 본듯한 다른 설정들과 달리 신선했다.
덧붙이는 글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