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나의 것, <승리호>의 김태리 _요주의여성 #4
‘멋짐’ 폭발! <승리호>의 매력적인 리더, 장선장의 서사를 담은 프리퀄을 기대하며.
BY양윤경2021.02.12
승리호〉가 날아올랐습니다. 지난 2월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승리호〉가 세계 콘텐츠 차트를 휩쓸고 있다고 합니다.
기대가 컸던 작품인만큼 영화에 대한 평은 갈라지지만, 대체적인 반응은 “익숙한 듯 신선하다”로 모아집니다. 기시감을 일으키는 설정과 이야기에는 아쉬움이 남지만, 한국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우주 세계를 배경으로,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장르물의 매력을 충분히 갖춘 영화. 만일 극장 개봉하여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몇몇 장면에서는 휘파람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시스템 밖에 있는 자들을 주인공 삼아, 대안가족과 화합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 미덕으로 다가옵니다. ‘업동이’를 통해 로봇의 성 정체성에 관한 편견을 뒤엎기까지!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승리호〉에는 ‘장선장’이 있으니까요. 어떤 이들에겐 〈승리호〉를 봐야 할 단 한가지 이유가 될지도 모를 그 이름, 바로 김태리가 연기하는 장선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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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올백 단발에 선글라스를 끼고 레이저 건을 든 김태리는 한마디로 근사합니다(심지어‘쩍벌’마저도). 승리호의 리더 장선장은 과거 천재공학자로 성장했으나 시스템에 반감을 품고 뛰쳐나와 해적단을 이끌었던 인물. 언뜻 술에 취해 거칠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가슴 깊은 곳에 변함없이 자신의 목표를 새기고 있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캐릭터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배경으로 우주복을 입고 모험을 펼치는 용감한 여자들을 보는 건 짜릿한 일입니다. 유리천정 따위는 가뿐히 깨부수는, 현실을 초월해 무궁무진한 상상이 허락되는 SF 창작물은 새로운 ‘여성 서사’ 장르로 각광받는 추세입니다. SF 속 여성 캐릭터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에일리언〉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로 시작된 역사는 더욱 다양한 작품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장선장을 보면서도 자연스레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가 스쳐 지나갑니다.
언제부턴가 우주함선을 이끄는 지혜로운 리더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만나게 됩니다. 〈마션〉에서 화성탐사대 리더 역을 맡은 제시카 차스테인은 특유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최근작으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어웨이〉의 힐러리 스웽크가 있습니다. 인류 첫 화성탐사선을 이끄는 주인공 에마 그린은 실제로 미국 최초의 국제 우주정거장 여성 사령관이자 ‘우주에 가장 오래 머문 미국인’으로 기록된 페기 윗슨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힐러리 스웽크는 비록 몸은 우주에 있어도 여자, 아내, 엄마의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한(이를 극복해가는) 인물의 고뇌와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장선장이 총을 든 터프한 히어로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겹쳐지기도 합니다. 실로 이 영화 이후 모든 ‘여전사’ 캐릭터는 퓨리오사와 비교되는 걸 피할 수 없죠. 한편 많은 이들이 〈승리호〉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연결하지만, 장선장 캐릭터만 본다면 ‘기모라’보다는 ‘발키리’가 더 가깝지 않을까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면서도 한순간에 불량배 무리를 제압하는 테사 톰슨의 ‘멋짐’ 폭발하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세요.
그러나 〈승리호〉의 장선장은 분명히 ‘김태리만의 장선장’이었습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장선장이 쓰레기함선의 리더라는 걸 납득하게 만드는 건, 배우 김태리의 능력이자 존재감입니다. 영화 〈아가씨〉로 스크린에 데뷔하면서부터, 김태리는 뚜렷한 눈빛과 단단한 연기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인물을 그려냈지요. 돌담을 뛰어넘고 들판을 질주하는 숙희(〈아가씨〉), 버스에 올라가 주먹을 불끈 진 연희(〈1987〉), 꽃이 되기를 거부하며 장총을 든 고애신(〈미스터 션샤인〉)… 자신만의 생각과 의지를 품은, 기품 있고 생명력 있는 캐릭터들의 숨결은 〈승리호〉 장선장에게도 이어집니다. 영화에서 축약된 장선장의 서사를 더 보고 싶고, 상상하게 만듭니다.
여성의 시각을 담은 SF가 얼마나 새롭고 벅차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김초엽 작가의 글입니다. 김초엽 소설집 〈우리가 빛이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마지막 글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인류 최초로’ 미지의 우주 터널 밖에 도달한 한 여성이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찬찬히 감상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온 몸을 휘감은 고양된 감정이 오래도록 남는 작품. 만일 〈승리호2〉가 나온다면, 장선장의 과거를 다룬 프리퀄이 되면 어떨까요? 물론 배우 김태리가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우주 영화라면 더욱 좋겠고요.
*찬양하고 애정하고 소문 내고 싶은 별의별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 ‘요주의 여성’은 매주 금요일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