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나노봇
장혜수 기자
1959년 12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미국 물리학회가 열렸다. 캘리포니아공대(칼텍) 물리학과 리처드 파인만(당시 41세, 1918~88) 교수는 ‘바닥에 풍부한 공간이 있다’라는 제목의 강연 도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체를 핀 머리 위에 기록할 수 있을까? 핀 머리 지름이 1.6mm쯤이니까, 2만5000배 확대하면 사전 전체를 펼친 넓이와 같다. 그렇다면 사전에 기록된 걸 2만5000분의 1로 축소하면 된다”며 내기를 제안했다. 책 한쪽을 2만5000분의 1로 처음 축소하는 사람에게 1000달러를 주겠다고. 과학사는 이 장면을 나노기술 개념의 탄생 순간으로 기록한다. 1985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생 톰 뉴먼이 찰스 디킨스 소설 『두 도시 이야기』를 파인만이 원한 크기로 축소해 상금을 챙겼다.
나노(nano)는 ‘난쟁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단어(nanos)에서 유래했다. 도량형 단위에 붙는 접두어로, 10억분의 1을 뜻한다. 원자 또는 분자 크기의 나노물질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대표 주자가 그래핀과 탄소나노튜브다. 탄소 원자가 육각형 격자 형태를 이뤄 원자 한 겹 두께로 배열된 물질이 그래핀이다. 그래핀을 튜브 형태로 만든 게 탄소나노튜브다. 독특한 물성을 가진 첨단소재다.
또 하나의 기대 분야가 나노로보틱스(nanorobotics), 줄여서 나노봇이다. 원자 또는 분자 크기 로봇을 말한다. 나노봇은 ▶바이오칩 ▶핵산 로봇(nubot) ▶바이오 하이브리드 ▶박테리아 기반 ▶바이러스 기반 등 다양한 형태다. 나노봇을 활용해 병을 진단, 치료하는 나노의학이 대표 선수다.
제작비 250억 원의 국산 블록버스터 SF영화 ‘승리호’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지구와 우주 정거장을 연결하는 우주 엘리베이터 ▶행성 환경을 지구처럼 만드는 테라포밍 ▶우주에서 지구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인공중력 ▶우주를 떠도는 쓰레기 등 다양한 SF 소재가 등장한다. 그중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 소재가 나노봇이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73)은 저서 『특이점이 온다』(2007)와 『영원히 사는 법』(2011)에서 나노봇이 만들 무병장수의 미래를 전망했다. 인류는 ‘승리호’ 속 꽃님이처럼, 나노봇으로 불치병을 치료하는 ‘특이점’ 이후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두 발은 아직도 코로나19의 늪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을.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