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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소식노는 언니들, 해방구를 만들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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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숲속의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신고 회원메모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movieli.st 작성일21.02.06 08:51 2,28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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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언니들, 해방구를 만들다

등록 :2021-02-05 19:18수정 :2021-02-06 02:3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위기의 TV’ 새 가능성


E채널 예능 ‘노는 언니’ 출연진

생리 고민, 생리용품 터놓고 얘기

“카메라 있으면 안 될 이야기”

이젠 여자선수 고민 편하게 토로

각별하고 짜릿한 해방감 선사


TV 위기 뒤엔 오래된 편견·관습

‘모두가 보는 방송’ 핑계 대고

특정 집단 발언 기회 부당 제약

배제됐던 이들 목소리 전한다면

‘구시대적’ 평가 벗어날 가능성

 

 

인간컬링 내기에서 진 방현영 책임프로듀서가 치킨을 샀다는 이야기에, 이(E)채널 <노는 언니> 멤버들은 방구석에 상을 펴고 옹기종기 둘러앉는다. 깊은 밤 야식만큼 유혹적인 게 없어서, 자기들끼리 다른 방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전현직 피겨스케이팅 선수들도 슬금슬금 밥상 앞으로 모인다. “너네는 자주 만나는데도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아? 거기(너네 있던 방) 카메라를 달았어야 하는 건데.” 박세리의 질문에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박소연은 웃으며 답한다. “(카메라) 있으면 안 될 이야기 해가지고….” 여기서는 다 이야기해도 된다는 박세리의 말과 멤버들의 웃음 속에, 박소연의 선배 곽민정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웃으며 말을 꺼낸다. “저희 그거 얘기했어요. 탐폰(스틱형 생리대) 사용하는 방법. (사용법을) 알려달라고 그래가지고.”

 

무심하게 군고구마 껍질을 까며 한유미가 말을 거든다. “그런데 저희(배구선수)도 약간, 선배 언니들이 가르쳐주고 막 그랬어요.” 곽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나도 연아 언니한테 배워서. 이게 엄마들한테 듣는 건 난 약간 은근히 창피하고 뭔가 안 물어보게 되어서, 얘들도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소연이한테 알려줬어.” 처음 새로운 제품을 사용할 때의 낯섦과 고충을 이해하는 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생리용품 이야기를 이어간다. “(탐폰) 처음에는 어려운데, (쓰다 보면) 쉬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는 박세리의 말에 이어 한유미가 시행착오들을 이야기한다. “나 그거 잘못 끼면 막 식은땀 나고 그래.” 정유인이 맞장구를 친다. “약간 어지러워. 어쨌든 이물질이 들어가 있는데 잘못하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자꾸 일으키는 거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자기 몸에 맞는 탐폰을 찾아가는 과정의 고충을 나누는 대화가 활발하게 섞이는 중, 남현희는 다른 제품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다. “요새는 그것도 있잖아, 생리컵!” 마침 생리컵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정유인이 사용후기를 들려준다. “그거 편해. 그런데 넣기가 너무 힘들어. 재사용을 하니까 환경적으로는 괜찮은데, 그래서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실리콘 컵 안에 담아서 가지고 다니고….” 처음에는 “카메라가 있으면 안 될 이야기”여서 가까운 선배와 조용히 나누던 대화는, 어느새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치킨에서 닭뼈를 발라내고, 음료수를 먹고, 옆사람에게 건네주고, 물티슈를 집어 손을 닦고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 녹아든 범상한 대화가 되었다. 지난 2일 방영된 <노는 언니> 멤버들이 피겨스케이팅 선수들과 함께 얼음을 지치고 눈썰매를 타러 강원도 홍천으로 갔던 어느 밤의 평범한 대화였다.

 

<노는 언니>가 생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9월, 캠핑을 떠나던 차 안에서 멤버들은 경기나 훈련 중에 생리가 시작되면 어떻게 대처했는지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수영선수 정유인은 물속에선 수압 때문에 생리혈이 나오진 않아도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흘러나올 수 있어서 그럴 때면 다 같이 나서서 치워주고 정리를 해준다고 이야기했다. 한유미는 배구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바지가 너무 짧아서 반드시 패드형 대신 탐폰을 사용해야 했던 이야기를, 남현희도 펜싱 경기복이 하얗고 소재가 얇아서 탐폰을 사용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세리는 골프 경기 중 생리혈이 새도 경기복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 비옷 같은 걸 걸쳐입곤 했던 고충을 토로했다. 경기에서 좋은 성과는 내야 하는데, 생리 주기가 훈련 일정이나 경기 일정에 맞춰주진 않으니 자신들이 알아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기를 보내야 하는 여성 운동선수의 고민이 전파를 탔다. 다들 카메라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탐폰과 생리컵 사용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건 그런 전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전혀 부끄러워할 이야기도, 피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걸 카메라 앞에서 증명한 바 있으니까, <노는 언니>는 그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었으니까.

 

지난 몇년 사이, 예능을 포함한 방송의 각 영역에서 여성 출연자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제 새로 론칭하는 프로그램이 ‘전원 남성’으로 팀을 꾸리면 당장 방송 시작 전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듣고, 여성 멤버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지나치게 보조적이다 싶으면 여성을 도구적으로 기용하지 말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럼에도 방송에서 남성 출연자가 여성 출연자를 대하는 태도나 함께 대화를 나누는 주제들은 여전히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종종 걸리적거리는 순간들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문화방송(MBC) <전지적 참견 시점>의 테이블은 여성 출연자의 비중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 안에서도 전현무는 게스트 문소리에게 막무가내로 애교를 요구하고, 서로를 대등한 상대로 대하기에 남편 장준환 감독을 ‘오빠’라 부르지 않는다는 문소리에게 자꾸 ‘준환 오빠’에게 영상메시지를 남겨보라고 부추겼다. 아마 지금까지의 예능이 ‘그래도 되는 장르’였고, ‘여성 연예인에게는 특정한 성역할을 요구하고 기대해도 되는 공간’이라고 여겼으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이리라. 오래된 편견과 관습은, 단순히 성비를 보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노는 언니>가 준 해방감이 더 각별한 건 그 때문이다. <노는 언니>의 ‘언니’들은 첫 화부터 이제까지 예능에서 관습적으로 택해왔던 ‘분위기 띄우기 위해 초대된 남자 예능인’들의 존재를 거부했고, 그동안 ‘여성들만의 일이라서 굳이 예능에서 나눌 것은 아닌 이야기’로 치부되던 생리와 연애,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나눴다. 누구도 감히 건들 수 없는 맏언니 박세리가 앞장서서 이야기를 꺼냈기에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고, 책임프로듀서가 여성이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며, 대화에 참여한 전원이 여성이었기에 더 편할 수도 있었을 테다. 결과적으로 발언 기회를 부당하게 빼앗겨왔던 집단이, 발언하면 안 된다고 부당하게 금기시되어온 주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방송에서, 특히나 예능에서 오랫동안 ‘하면 안 될 것 같았던 이야기’처럼 여겨지던 주제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자, 방송은 이처럼 새롭고 짜릿해졌다.

 

 

티브이의 새 미래인가

 

갈수록 넷플릭스나 유튜브, 팟캐스트 등의 새로운 미디어들이 그 영토를 침범해오면서, 기존의 티브이는 점점 지배적인 지위를 잃어가는 중이다. 연일 ‘티브이의 미래’, ‘지상파의 위기’, ‘케이블 채널도 안전하진 않다’ 등의 말들이 나오고, 산업이 어떤 식으로 시대적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어쩌다가 시청자를 잃었는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이 특정 정파의 입맛에 맞는 이들만 남겨놓고 나머지 직원들을 죄다 귀양 아닌 귀양을 보냈던 시절, 방송이 자신들의 정견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청자들은 티브이 앞을 떠나 팟캐스트로 옮겨갔다. 한국의 방송이 좀처럼 자신들의 서사를 다루지 않고 심지어는 오도하는 상황에 지친 성소수자들과 앨라이(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연대하는 비성소수자)들, 자막방송도 화면해설방송도 영 신통치 않은 한국의 방송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질린 장애인들은 넷플릭스로 떠났다. 또래 집단의 삶과 고민이 방송에선 누락됐다고 여긴 청소년들은 유튜브로 떠났다. 티브이가 위기에 처한 것에는, 어쩌면 “모두가 보는 방송”이라는 핑계로 특정한 집단의 발언 기회를 부당하게 제약해왔던 과거도 크게 일조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부당하게 발언권을 빼앗겨온 이들에게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 또한 티브이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상상해보라. 여성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이주민이, 청소년이, 그동안 티브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더 많은 이야기들로 티브이를 다채롭게 채우는 광경을, 그렇게 연일 더 새로워지고 짜릿해질 해방감을, 구시대의 유물처럼 전락해가던 티브이가 다시 한번 가장 새로운 미디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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