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수경
- 승인 2021.02.04 21:20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 스틸컷
“우리는 전쟁 중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사람들이 죽는단 말이오. 그 와중에 간혹 예술작품도 사라지는 거죠.” 나치의 파괴와 약탈로부터 유럽 각국의 위대한 예술품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분투를 그린 영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에서, 미술사학자 프랭크의 브리핑을 들은 국가 최고위층의 일갈이다. 인류 문화유산도 결국 사람의 손길로 탄생했으니 예술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 사람이 죽어나는 판국에 미술품을 구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혀를 차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감염병 시대에 들어선 지 1년이 되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안간힘 쓰는 와중이지만 여전히 대다수 시민의 삶은 고달프고 피로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일상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돌이켜보면 참혹한 시절의 한복판에서도 예술은 역할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쉬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미증유의 감염병은 문화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일부 매체에선 본질적 변화마저 감지되었다. 이를테면 영화관 대신 안방극장을 선택했고, 온라인 공연에 눈을 돌렸으며, 줌과 구루미 등 화상시스템을 이용한 커뮤니티의 다양화를 꾀하고 있다. 2020년 한국사회를 휩쓴 트롯열풍과 넷플릭스의 비약적 확산과 대형 텔레비전 판매량 급증은 감염병 시대에 변화된 일상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절망이 휩쓸고 간 자리. 지진으로 초토화된 땅, 전기와 수도시설은 물론 식량도 부족한 형편없는 생존조건. 아이들의 스웨터 소매 밑은 너덜너덜 해져있고 누런 콧물이 마를 새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연인들은 결혼해 비닐천막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마을사람들은 월드컵 축구중계 관람을 위해 TV안테나를 설치한다. 지진의 참상을 자세히 전하던 아이는 “참 많이 자랐구나” 라는 인사에 “사람은 누구나 자라잖아요” 라고 어른스럽게 대답한다. 고통 가득한 세상을 담담하되 온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영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한 장면이다. 그렇다! 암흑 같은 시절에도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노래를 하고, 또 누군가는 사랑을 꿈꿨다. 그런 열망과 강인한 생명력이 인류를 오늘에 이르게 했고, 예술은 인간의 필사적 노력을 위무하며 유구한 세월을 이어왔다.
극적으로 팀이 결성되고 유럽에 도착해 본격적인 예술품 탈환·수호 작전을 앞둔 밤. 프랭크는 전 대원에게 호소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는데 누가 예술에 신경 쓰냐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문화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위해 싸우는 겁니다. 한 세대의 인류를 휩쓸어 버릴 수는 있겠지만, 집은 전부 불태워 버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어떻게든 되돌아옵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룬 성취와 역사를 파괴한다면 우리가 존재했다는 근거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혹자는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문화예술이 웬 말이냐고 손사래 칠지도 모른다. 힘든 시절일수록 위로의 손길은 절실하다. 지금이야 말로 예술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진 예술이 엄혹했던 한 시절을 증언할 것인즉. 진실로,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와 당신도 한 뼘 자랐기를 간구한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출처 : 대구신문(http://www.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