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1.01.11 09:35
로맨스 남녀주인공 사이의 친밀함과 관능을 표현한 브리저튼 포스터 ⒸNetflix
1. <브리저튼>의 드라마화가 야기한 문제
2020년 12월 25일 첫 방영된 이후 현재까지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브리저튼(Bridgerton)>은 전형적인 시대극 로맨스다. 장르적 관습에 따라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브리저튼>은 리젠시(Regency) 로맨스다. 영국의 섭정시대인 1811년에서 1820년 사이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를 일컫는다. 영국의 섭정시대는 조지 왕조의 말기에 조지 3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통치에서 물러나고, 이후 조지 4세가 되는 왕자가 섭정을 맡았던 시기를 가리키는데, 짧게는 왕자의 섭정기간인 1811년에서 1820년까지로 보고, 길게는 조지 왕조 말기에서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하지까지인 1795년에서 1837년 사이로 보기도 한다. 섭정 시대를 뒤따라 올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기는 영국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안정을 찾으며 문화가 융성하는 시기다.
그런데 왜 이 시기를 특정한 로맨스 장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문화가 융성했던 시기니 만큼 화려함을 추구하는 로맨스 시대극의 배경이 되기에 적당하기도 할 터이다. 하지만 모두 짐작하고 있다시피, 이와 다른 이유에서 로맨스 장르에서 리젠시 시대는 더욱 특별하다. 영국의 섭정시대에 바로 현대 로맨스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들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로맨스의 고전 『오만과 편견』은 1813년에 출간되었다. (역시나 <브리저튼> 시즌1의 배경 또한 1813년이다.) 게다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작품들은 작가가 작품을 발표했던 그 섭정시대의 현실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이 창조한 연애, 사랑, 결혼의 세계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로맨스 장르는 역사로맨스 중에서도 이 섭정시대를 특화시켜, 리젠시 로맨스라 부르는 하위 장르를 만들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브리저튼>은 줄리아 퀸(Julia Quinn)의 리젠시 로맨스 ‘브리저튼 시리즈’의 첫째 권인 『공작과 나(The Duke and I)』(한국어 번역 제목은 ‘공작의 여인’)을 드라마화 한 것이다. 원작자 줄리아 퀸은 리젠시 로맨스의 대표 작가이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작가와 작품의 유명세가 이 작품의 드라마화가 화제를 끄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와 더불어 드라마 <브리저튼>은 연출진도 화려하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프로듀서 숀다 라임스 등이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그레이 아나토미>를 함께 작업했던 크리스 반 두센이 연출을 맡았다.
원작과 연출에 대한 신뢰도와 이로 인한 화제성으로 인해 <브리저튼>은 개봉 전부터 꽤나 화제작이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올라온 이후 지금까지도 좋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다.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92%를 얻으며 대중적 작품 5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신선도 작품 10위권 내에도 진입해 있다. IMDB에서도 평점 7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 양상을 보인다. IMDB에 올라온 일반 관객의 평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브리저튼>은 평점 7점 정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 평가는 1점과 10점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누군가는 최악의 시간낭비 작품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최고의 몰입감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평가가 갈라지는 논쟁의 지점은 바로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면서 연출진들이 시도했던 흑인 배우의 기용이다. 제작진은 배우 채용에 인종적 기준을 두지 않았다.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colorblind casting)’을 한 것이다. (Julia Jacobs, “With ‘Bridgerton’ Scandal Comes to Regency England”, The New York Times, 2020.12.18.) 현실의 사회적 맥락을 담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서 사랑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담아내려 했으며, 이 맥락에서 인종적 불평등함을 넘어서려 했다.
제작진의 이러한 시도는 관객과 우리 사회에 꽤나 흥미로운 결과를 안겨주었다. 흑백 차별이 명백했던 19세기 후반 영국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흑인 귀족들이 나오고 동양인 상류층들이 배경으로 서 있다니! 이 지점을 둘러싸고, 역사적 고증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로맨스일 뿐이다, 현실 정치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올바름을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2. 로맨스의 성공
로맨스의 관점에서 보면, <브리저튼>은 아무런 문제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브리저튼 자작 집안의 첫째 딸인 다프네가 최고의 결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결혼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공작 사이먼과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계약 연애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여, 마침내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다프네는 그 시즌 사교계 최고의 신붓감으로 알려졌음에도 세상물정 모르는 큰오빠의 과보호로 신사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인기를 회복시켜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하기 위해 다프네는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켜 줄 공작과의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이와 달리 사이먼은 어린 시절 가문의 완벽함을 위해 아들인 자신을 방치했던 부친에 대한 증오로 가문의 절멸을 위해 결혼을 거부하는데, 사교계에서는 오히려 사이먼의 이런 태도가 딸을 가진 어머니들의 승부욕을 불태우게 한다. 사이먼은 이 귀찮은 어머니들을 떼어 버리기 위해 다프네에게 계약 연애를 제안한다.
계약 연애라는 명목 하에 두 남녀 주인공은 자주 만나게 되고, 당연하게도 서로의 매력을 발견하며,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어 남주인공의 사랑을 획득한다. 그런데 로맨스의 매력, 특히 영상화된 로맨스의 매력은 이렇게 뻔하게 진행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장면의 매혹적인 표현이 더욱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브리저튼>은 훌륭한 로맨스 드라마다.
제작진이 여성의 관점에서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다프네가 자신의 욕망을 각성하는 단계가 섬세하게 진행된다. 다프네와 사이먼이 서로 가까워지면서 점차 호감을 느끼는 순간, 사이먼은 춤을 추다가 다프네의 등에 두른 자신의 손을, 다프네의 옷 위에서 맨살이 드러난 등 위로 살짝 올려, 손가락 2개 정도를 조심스럽게 다프네의 등에 내려놓는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는 다프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관능적이고도 서정적인 공기. 이 미묘한 신체 접촉 이후로 다프네는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제 아무리 프러시아의 왕자라 하더라도 다프네의 시선을 사이먼에게서 떼어놓지 못한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사이먼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후 서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맞닿는 손. 친밀하면서도 관능적인 순간. 이러한 작은 접촉의 순간들은 다프네의 사랑이 정신적 친밀함을 넘어 육체적 열망까지도 간직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브리저튼>은 이러한 친밀함의 진전과 관능의 고조를 매력적으로 고양시킨다.
사실 <브리저튼>은 ‘성인용 로맨스’다. 남녀의 섹스 장면이 넘쳐나는 19금 로맨스다. 이 또한 최근 로맨스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짚은 지점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후 로맨스는 여성의 육체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여성을 위한 소프트 포르노 장르가 되었다. <브리저튼> 또한 다프네와 사이먼의 관계에 내재한 사랑을 열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두 사람의 결혼 이후 장면을 거의 섹스씬으로 채웠다.
이러한 관능성 아래에서 남자 주인공의 섹시미가 극대화된다. 사이먼 역을 맡은 레지-장 페이지(Rége-Jean Page)는 <아웃랜더(Outlander)>의 샘 휴언 이후 가장 섹시한 로맨스 남자 주인공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이 계보는 <오만과 편견>의 콜린 퍼스, <북과 남>의 리차드 아미티지에서 이어져 온다.) 샘 휴언과 함께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으로 거론될 만큼 주가 상승 중이다. 다프네의 시선에 포착된 사이먼의 자태는 섹시 그 자체다. 숟가락을 핥는 혀, 소매를 걷어붙일 때 드러나는 팔뚝 등등. 이렇게 남자주인공의 매력을 관능적으로 그려내고, 그래서 새롭고 신선한 남자 배우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 이것 또한 로맨스의 성공이다.
흑인 여왕 샬롯을 내세운 브리저튼 포스터 ⒸNetflix
3. 장르 관습, 역사 고증, 현실 정치의 이질적 충돌과 문제제기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로맨스의 문법을 현실의 정치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면서 발생한다. 시대극 로맨스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인종 편향이다. 영미권 시대극 로맨스의 대부분이 섭정시대를 바탕으로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왜 로맨스 독자들은 영국, 백인, 이성애 중심의 사랑에 대한 환상과 동경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인종과 문화권에 관계없이 로맨스의 시선은 상당히 영국(UK 중에서도 England) 중심적이다. 영국이 로맨스의 종주국이니까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미국 제작사에서 만든 <브리저튼>은 이러한 로맨스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시대극을 만들면서 현실 사회를 반영하는 시선을 더욱 강조하였다. 역사적 고증이라는 강박에 휩싸이지 않고, 현실의 관점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판타지의 공간을 열어 놓는다. 섭정시대에 흑인이 귀족일 수 있었다는 설정을 과감하게 가져 온다. 감독 크리스 반 두센은 이 작품에서 역사와 환상을 결합시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Julia Jacobs, Ibid.) 그래서 흑인 배우를 고용하면서도 그 설정이 완전한 환상으로 넘어가게 하지 않기 위해, 샬롯 여왕이라는 실존 인물을 배치한다. 샬롯 여왕은 포르투갈 왕족이지만 아프리카 계의 혈통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영국 해리 왕자의 부인 메건 마클이 영국 왕실로 들어갈 때, 메건 마클이 영국 왕실 최초의 흑인이냐 아니냐의 논쟁에서 다시 소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이먼의 권투 선수 친구 윌 몬드리치는 19세기 흑인 권투 선수 빌 리치몬드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이 작품이 상상에 기반한 대체역사물이라고 했으면 훨씬 편할 뻔했다. 그랬다면, 샬롯 여왕과 조지 3세의 결혼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인종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가능했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이 조금 더 자유로웠을 것 같다. 그런데 제작진이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려고 했다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 시대에 샬롯은 왕실의 혈통으로 영국 왕가에 입성했는지 모르지만, 인종 차별은 그 시대는 물론이고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여전히 강고하니까. 현재의 관점에서 우리가 올바르다고 믿는 정치적 관점을 19세기에 투영하는 것은 명백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지겨운 역사적 고증 문제가 들어선다. 2000년대 초반에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팩션(faction)의 등장 이후로, 역사허구물에서는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나머지를 그럴 법한 상상을 통해 만들어 내는, 정말로 허구적인 역사물이 주류이다. 이러한 팩션에 대해서 다큐멘터리 수준의 역사허구물을 원하는 관객들은 언제나 역사적 고증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대중문화를 비판한다. 이 논쟁에서 아예 벗어나기 위해서 한국의 역사로맨스는 조선시대라는 배경만 남겨 두고, 실존하는 왕이 아닌 허구의 왕을 내세워, 시대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든다. 이런 작품들은 고증 문제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브리저튼>은 굳이 고증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이럴 경우 <브리저튼>이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상당히 웃겨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현재적 관점을 내세워 흑인들도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 19세기 섭정시대라면, 그 시대의 여성들은 왜 아직까지 자신들의 주체적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 것일까. 인종차별은 쉽게 철폐될 수 있어도 남녀평등은 쉽게 쟁취할 수 없는 것인가. (하긴 역사 이래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난 가부장제의 현존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한편, 현재의 페미니즘적 시각을 작품에 충분히 반영하고자 했다면, 여성의 주체성이 훨씬 부각된 작품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로맨스 속 여성의 주체적 시각은 항상 관능의 표현으로만 국한되는 것일까. <아웃랜더(Outlander)>부터 시작해서 로맨스 속 페미니즘은 섹스 장면을 얼마나 여성적 시각으로 찍었으냐, 여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결국 여성향 로맨스 작품 속에서 여성의 시야는 정신적 사랑에서 육체적 사랑으로만 넓어졌을 뿐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일까.
게다가 역사를 현재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 자체의 문제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의 한계를 현재의 소망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문화적 관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이러한 새로운 상상을 통해 우리는 기왕의 역사가 우연한 선택일 뿐 필연은 아니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역사를 현재의 관점으로 식민화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잣대로 역사를 평가할 경우, 역사는 그 자체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고, 문제적 지점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흑인 배우의 기용으로 물리적으로만 흑인의 노출을 증가시킨다고, 19세기 흑인 노예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흑인 노예의 문제를 문제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 아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흑인 노예의 문제를 없었던 것처럼 취급할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다른 시대극 로맨스 작품은 오히려 역사적 시대의 한계를 부각시키고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에서는 귀족과 하인의 명백한 계급차를 드러내었다. 지하의 하인과 지상의 귀족이라는 공간적 구조를 미학적으로 활용하면서, 이 두 계급 각각의 윤리와 직분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러한 계급 구조가 가진 한계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깨어지게 되는지도 보여주었다. <아웃랜더> 또한 2차 세계대전을 치른 현대 여성이 타임슬립을 통해 18세기 영국, 19세기 미국으로 가게 되지만, 그 당시 여성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가감 없이 경험하는 것을 통해 오히려 여성의 인권 문제를 각성시킨다. 여주인공 클레어도 그녀의 딸인 브리아나도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에 도착했을 때, 모두 강간의 위기에 처하고, 실제 브리아나는 강간을 당해 원치 않는 아이를 낳기도 한다. 이렇게 시대극 로맨스는 역사의 실제적인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여성이 처한 문제적 상황, 그리고 계급의 문제, 더 나아가 인종 차별의 잔인함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번역을 둘러싼 문제를 직역이냐, 의역이냐로 단순화하여 정리한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데, 의역은 낯선 외국 작품을 독자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고, 직역은 낯선 외국 문화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서, 독해에는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독자의 현실과 다른 또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한다. 현실의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 과거를 재해석 하는 문제 또한 이러한 번역의 고민과 맞닿아 있을 지도 모른다. 과거를 현재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킬 것인가, 과거의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인가.
<브리저튼>은 이러한 경계 속에서 현재의 정치적 올바름을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지만, 사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이렇게 로맨스의 장르적 관습, 역사적 고증, 현실의 정치적 올바름, 이 모든 것을 잡으려고 하다가 만들어진 균열 속에서, 인종 차별과 여성 인권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제기된다면, 그래서 로맨스 독자들도 리젠시 로맨스가 가진 일정한 편향성에 대해서 한 번 쯤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쟁과 고민을 소란스럽게 하며, 이 시끄러움이 계속 이어져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글·이주라(문화평론가)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