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무사히 어른이 되기까지는
작년 말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 사고가 났다. 잘 달리던 차의 브레이크가 1차선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작동을 안하면서 그대로 차가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수습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확률적으로 따져보면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TV나 인터넷에 종종 등장하는 사고 영상에서 속도를 줄인 앞차를 늦게 발견하고 그대로 들이박는 차량이 얼마나 많은지. 나의 경우 뒷차들이 모두 빠르게 속도를 줄여주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아니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만약 트럭 같은 대형차량이 최고 속도로 달리다가 그대로 와서 박았더라면. 삶과 죽음의 거리가 생각만큼 멀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생각해보면 ‘삶이 뒤흔들릴 뻔’한 순간은 그 외에도 많았다. 간발의 차이로 자동차 사고를 모면했을 때. 첫째의 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갔다가 수술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마가 원인 모를 병명으로 쓰러졌을 때. 내 왼쪽 가슴에 뭔가가 만져진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았을 때. 진료실 앞에 홀로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릴 때.
조금 더 거슬러 가보면 더욱 많다. 회식이 끝나고 귀가하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친구들과 클럽에 갔다가 나의 의지와 무관한 상황에서 도망쳐야 했을 때. 기르던 강아지를 안락사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집에 데려다 준다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차를 탔을 때.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를 따라 위험한 곳에 갈 뻔 했을 때. 엄마 아빠의 가게까지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던 유치원생 시절 이상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
돌이켜보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실은 안전망 하나 없는 외나무 다리를 안대로 눈을 가린 채 건너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는 멀쩡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흔들흔들 비틀비틀 거리면서, 몇 번이고 발을 헛디뎌 다리에서 떨어질 뻔 하면서. 물론 발을 한번 잘못 디뎠다고 그대로 삶이 끝나지는 않았겠으나, 아마도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 같다.
그러고보면 일상이란 참으로 위태로운 것이다. 평온해보이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실 기적같은 확률로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질병, 자연재해, 사건 사고,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기만과 배신과 모욕과 상처. 그런 것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야만 간신히 유지되는 것이 다름아닌 ‘일상’이다. 그러나 정작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많은 날들을 지나간다.
이하 영화 [벌새]와 [나의 문어 선생님]의 줄거리 일부가 포함된 글이 이어집니다.
스포일러의 불안을 염려하는 독자에게 알립니다. (편집자)
영화 [벌새]는 한 사람이 무사히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남의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주변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인 은희의 일상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갖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권위적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불행한 어머니, 자꾸만 엇나가는 언니, 공부는 잘하지만 끝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 그런 가운데 오로지 오빠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들.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고, 더욱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자잘한 폭력이라도 겹쳐지면 벗어날 수 없는 두터운 굴레가 된다. 오빠에게 맞았다는 하소연에 그저 “싸우지 마!”라는 한 마디로 일갈하는 부모님. 그런 집에서 은희는 막막하기만 하고, 방향을 잃어버린 마음은 점점 더 바깥으로 흘러만 간다. 이유도 없이 담배를 피우고, 문방구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을 훔치다 붙잡히고, 학원을 땡땡이 치고, 친구와 학원 선생님의 옷차림을 비웃으면서 은희의 시간은 흘러간다.
가족의 굴레만 은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는 잠을 자고 수업 시간에는 그림만 그리는 ‘열등생’ 은희를 무시하고, 은희의 눈이 사슴같다며 감탄하던 남자친구는 어느날 갑자기 다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떠나간다.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단짝 친구는 문방구에서 도둑질이 들키자 은희에게 떠넘긴 채로 도망을 치고, 은희가 너무나 좋다며 다가오던 후배는 학기가 바뀌자 모두 지난 일이었다며 태도가 돌변한다.
거기에 건강마저 은희를 위협한다. 어느날 은희의 귀 뒤에 혹이 만져졌던 것이다. 이 혹은 결국 심상치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은희는 큰 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받고 조직검사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은희의 일상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겨울철 연못의 두터운 얼음이 외부의 압력에 위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금이 가는 것처럼. 그러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되는 것처럼.
물론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모든 ‘위기’를 은희는 무사히 이겨낸다. 어떤 특별한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봉합된 것도 있고, 갈등에 있는 그대로 부딪혀 없애버린 것도 있다. 그저 지나가길 담담히 기다린 것도 있고, 끝끝내 해결되지 않은 것도 있고, 그냥 실금이 생긴 그대로, 상처받은대로 놓아버린 것도 있다. 조직 검사한 혹이 알고봤더니 양성이었다는 식으로 행운으로 벗어난 경우도 있고.
그리고 이런 은희의 곁에는 한문 학원 교사인 ‘영지 선생님’이 있다. [벌새]는 은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좋은’ 어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어디선가 김보라 감독이 김영지라는 캐릭터에 자신이 살면서 생각하거나 만났던 좋은 어른의 모든 점을 응집시켰다고 말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영지 선생님이란 사람은 정말로 그러하다.
그는 쉽사리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다. 철거민을 보고 불쌍하다는 말을 하는 은희에게 알 수 없으므로 함부로 동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 또한, 그는 함부로 갈등을 수습하거나 봉합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문방구 도난 사건 이후 절교하다시피한 은희와 친구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사람. 거기에 그는 손쉬운 위로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싫어질 때 어떻게 하냐는 은희의 말에 “너는 멋진 사람이니 너 자신을 싫어할 필요 없다”는 뻔한 말 대신 자기는 그럴 때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
나는 이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얼마 전 보았던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 크레이그 포스터는 집 앞 바닷가에서 한 문어를 발견하고, 교감하고, 사랑에 빠지지만, 결코 문어가 겪는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않는다. 문어가 상어에 먹힐 뻔할 때는 상어를 쫓아내는 대신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죽어가는 문어를 집에 데려가 치료해주는 대신 회복할 수 있도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이 위기에 빠진 것을 어떻게 그대로 바라만 본단 말인가. 하지만 만약 크레이그가 문어와 교감을 나누는 것을 넘어 문어의 삶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문어는 어찌되었건 문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저 말 없이 문어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장 나서서 도와주고 싶은,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대신 문어가 다가올 때는 그 자리에 머물면서. 문어의 생을 내내 지켜보면서. 마음 깊이 응원하면서.
나는 비록 신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인간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 특별히 더 마음을 주게 되는 인간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유로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것이므로 인류의 생태계 안에서 해결되도록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벌새]로 돌아오면, 영화에서 영지 선생님 역시 은희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은희의 문제를 해결해준 적도 없다. 친구와의 문제, 남자친구와의 문제, 오빠와의 문제, 자기 자신과의 문제. 그는 그저 애정을 가지고 담담히 은희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은희의 전폭적인 애정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적절한 호응을 하지도 않으면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아마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은 자잘한 불행이 많았던 은희의 일상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희가 아마 위태로운 일상을 비틀비틀하며 걸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행운의 도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은희의 주변에는 가끔씩 좋은 어른들이 등장한다.
병실에 홀로 입원한 은희를 기특하다고 챙겨주며 밑반찬을 덜어주는 낯선 어른들.
고막이 찢어진 은희를 보고 이면의 폭력을 걱정하는 의사 선생님.
그처럼 은희는 자잘한 불행과 그에 버금가는 자잘한 행운, 그 이상의 수많은 우연을 거치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어른이 된다.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에서 김보라 감독은 영지 선생님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한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늘 그렇듯이 삶이란 양면적이다. 불행이 있으면 행운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존재한다. 사랑이 희열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의 삶은 많은 순간 비루하고 불행하지만, 가끔씩 존재하는 행복과 찰나처럼 다가오는 햇살 같은 순간들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 같다. 그것이 삶인 것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한승혜
초대필자.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