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대격변, 일상을 지키며 맞은 한반도의 변화. 그 사계절의 이슈 스무 가지.

역병

코로나19가 올해 초 발발했다. 기침이나 재채기할 때 생긴 비말을 통해 전파되는 이 질병은 전 세계 사람들을 갈기갈기 갈라놓았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인격의 밑바닥을 보았고 사회적 약자부터 피해를 입는 세상의 민낯을 봤다. 사람을 피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사람을 두려워했지만 사람을 통해 헤쳐가야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언택트, 코비디어트, 코로나 블루, 확찐자, 집콕, 상상 코로나, 턱스크, 코로나 이혼, 코로나 앵그리, K-방역 등 코로나19로 인해 생긴 신조어는 셀 수 없다. 신조어는 변화를 상징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 휴식하고 소비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세상을 바꿨다. —조소현

 

<기생충>이 쏘아 올린 공

내년 2월 28일에 열려야 할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4월 25일로 연기됐다. 코로나19로 세계 영화 개봉 일정이 밀리면서 시상식을 열기엔 올해 개봉작이 부족해서다. 지난 2월 9일 오스카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호명된 ‘패러사이트!’라는 호응이 벌써 아련하다. 작품상 등 4개 부문 석권 후 귀국한 봉준호 감독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국민들께 박수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했는데 여전히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니 허탈하다. 하지만 <기생충>이 남긴 긍정적 여파는 지속된다. <기생충> 외에도 BTS의 선전, 다양한 한국 컨텐츠의 성장이 함께하지만, 상반기 한국 저작권 무역수지는 10년간 최대치로 10억4,000만 달러 흑자다. 미국의 외교 분야 여론조사 기관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한국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60점. 1978년 조사 시작 이래 가장 높은 점수다. 라면 수출액은 10월 말에 역대 최대인 5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 역시 <기생충>의 효과가 언급된다. 최근 화제인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함께한 한국관광공사의 서울 홍보 영상에는 종로구 자하문터널이 등장한다. <기생충> 포스터처럼 멤버들의 눈을 가린 채 말이다. <기생충>의 여파는 이상하게 질리지 않는다. —김나랑

 

당근이죠!

스마트폰 바탕 화면에 당근마켓 앱이 안 깔려 있다면 당신은 과거에 사는 사람. ‘당신 근처’를 내세운 당근마켓 활성 이용자(MAU) 수는 9월 기준 1,000만 명을 넘었다. 앱을 개설한 지 고작 5년 만에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몇몇 ‘국민 플랫폼’만 달성한 수치를 기록했다. 2년 전만 해도 활성 이용자 수가 100만 명 수준이던 당근마켓이 10배 성장을 달성한 데는 전 세계 ‘정리’ 열풍이 한몫했다.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출연하는 넷플릭스 프로그램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부터 tvN의 <신박한 정리>까지, ‘비우기’가 트렌드가 되면서 차곡차곡 공간을 채우는 것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미니멀리스트’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6km 이내의 동네에서 이뤄지는 직거래를 내세운 점은 시너지를 일으켰다. 차갑고 딱딱한 ‘중고NARA’가 20년 동안 지켜온 왕좌를 단시간에 빼앗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 역시 ‘당근’ 특유의 ‘친근함’ 덕이 크다. 이 작은 플랫폼 안에서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물건을 나누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약속을 잡고 거래 후에는 ‘매너 온도’를 높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구매한 물건 대신 ‘벽돌’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신 훈훈한 인사와 정이 오간다. ‘와이프 심부름으로 당근 딜리버리를 했더니 한 달 용돈이 넉넉해졌다’, ‘샤넬 원피스에 셀린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여성이 스포츠카를 타고 와서 3,000원짜리 물건을 사갔다’ 등 후일담도 이어진다. 이렇게 당근마켓은 단순히 중고 거래를 넘어 각종 동네 소식과 정보 교류가 오가는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다. 예전에는 ‘쇼핑’ 카테고리로 분류되었다가 최근 ‘소셜’ 파트로 바뀐 것만 봐도 ‘당근’의 신분 상승을 눈치챌 수 있다. 언택트 마을회관이 된 이곳에서 사람들은 요즘 사는 얘기를 나누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소소한 지역 정보도 얻는다. 하지만 단기간에 라이징 스타로 떠오른 만큼 잡음도 많다. 20만원에 36주 된 아기를 판매한다는 글을 올린 제주도 미혼모, 장애인을 판매한다는 게시물을 올린 초등학생, 국방부 마크가 새겨진 군용품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내 근처에서, 원하는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제값에 처분할 수 있는 당근마켓은 미니멀 라이프 실현에 완벽한 조력자이고 소소한 삶의 활력소다. —공인아

 

두 개의 공석

2020년 대한민국 1·2대 도시 서울과 부산의 시장직이 나란히 공석이 되었다. 부산 시장은 성추행 폭로 후 자진 사퇴, 서울 시장은 폭로 전 자살했다. 한국 여성 인권 운동에 큰 획을 그은 박원순 전 서울 시장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특히 큰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여성운동 동지였던 정춘숙 의원은 무거운 침묵 끝에 “‘절대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사건은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는 의미심장한 인터뷰를 남겼다. 진정으로 시민운동가 박원순의 업적을 기리고 싶다면 덮어놓고 그를 추앙하기보다 그가 발전시킨 여성 인권 개념을 바탕으로 그의 마지막을 평가하는 게 옳다는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박원순 전 시장의 일부 지지자들은 그가 그럴 리 없다, 혹은 별일 아닌 걸로 여성계가 논란을 만들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모순될 수 있다. 그 모순을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조직에서, 위계에 의해 벌어지는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별일’이라는 개념을 한국에 도입한 인권 변호사 박원순의 업적까지 무위로 만들고 있는 게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이 분열과 상처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서울과 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는 2021년 4월 7일에 열린다. 다시 위력에 의한 성범죄로 공석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또 시민사회의 갈등이 봉합될 수 있도록 훌륭한 후보들이 나와주기를. 이미 우리에겐 유능한 여성 정치인들이 있다. —이숙명(칼럼니스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트로트

상반기 잡지사는 임영웅 잡기에 혈안이 됐다. 소속사는 전화 연결이 잘되지 않았고, 오늘 문자를 남기면 며칠 후 답이 왔다. 11월 발매된 임영웅의 새 싱글 ‘HERO’는 발매와 동시에 벅스, 지니 실시간 음원 차트 1위를 기록했다. 김호중은 각종 구설에도 앨범 판매량 40만 장을 넘겼다. 길보드 중심이었던 트로트 소비는 공식 시장이 됐다. 주역은 <미스터트롯> 출신들이다. 작년에 방영된 <미스트롯>, <놀면 뭐하니?>의 유산슬, 올해 초 <미스터트롯>과 <사랑의 콜센타> 등으로 트로트는 정점을 맞았다. 이뿐 아니라 ‘뽕끼’를 넣은 프로그램이 줄지어 나오면서 피로도가 높을 만한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 최근 MBC는 오디션 형태의 <트로트의 민족>을 시작했다. <트로트의 민족>의 심사위원 이은미는 이런 얘기를 했다. “한때 트로트처럼 단순한 구성의 음악은 신경 안 썼어요. 하지만 비 오는 날, 포차에서 술 취해 혀가 꼬인 남성분이 부른 ‘무정 블루스’에 마음이 움직였죠. 아, 노래란 원래 이런 것이지 싶었죠.” 이은미는 ‘무정 블루스’를 리메이크했다. 이렇듯 트로트는 정통의 강자다. 1935년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이 여전히 불리듯, 마음을 울린 트로트는 스탠더드 넘버가 된다. 여기에 지금 트로트의 성행 이유는 세대 포괄성 덕분이다. 임영웅이 커버한 인디 밴드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를 할머니가 찾아 듣고, 김연자의 EDM 트로트 ‘아모르 파티’는 아이돌이 즐기면서 역주행했다. 레트로의 유행이 트로트까지 번졌다는 분석이 있고, 트로트가 변화했기에 재조명받았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힙합이 한때 왕좌를 차지했다가 피로도와 구설수로 살짝 밀려났듯, 특정 장르의 대유행은 한계가 있다. 우려먹기보다 다른 고심이 필요하다. —김나랑

 

넷플릭스의 풍요 속의 풍요

코로나 시대에 OTT와 IPTV는 날개를 달았다. 넷플릭스는 전반기에만 신규 가입자 2,500만 명을 모았고, 한국에서도 서비스가 시작될 디즈니 플러스와 애플 TV 플러스도 규모를 늘리고 있다. 한국산 OTT 서비스 왓챠플레이는 넷플릭스의 강점으로 거론되는 탄탄한 추천 시스템과 알고리즘을 통해 방향성을 확고히 했고, 지상파의 방대한 라이브러리와 오리지널 컨텐츠를 무기 삼은 후발 주자 웨이브도 선방 중이다. 올봄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로 직행하며 지각변동을 예고했다시피, 지금 가장 뜨거운 신인 이충현 감독의 <콜>도 넷플릭스로 틀었다. 2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인 조성희 감독의 대작 <승리호>도 넷플릭스행을 고려 중이다. 이 경우 제작비를 보전하고 해외에 영화를 빠르게 알릴 수 있지만, 컨텐츠에 대한 모든 권리가 넷플릭스에 넘어간다. 추가 수익을 기대하거나 창작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난제가 있다. 지금 상황에서 넷플릭스행은 차선이 아닌 차악일 수 있다. 넷플릭스가 망 사용 이슈로 한창 시끄러운 가운데, 영화계는 국내 OTT 서비스의 월정액 구독 방식을 문제 삼고 있다. 관람 시간으로 수익을 산출하는 방식 때문에 판권사가 결과적으로 회수하는 금액은 영화당 평균 100원에 불과하다. 컨텐츠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얘기다. 환경이 급변하면서 예상치 못한 구조의 문제가 드러난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상의 호황, 하의 불황

자기만족을 위해 패션을 사랑한다고 애써 믿었던 우리는 인정해야 했다. 옷을 사고 입는 건 남에게 보여줄 때 훨씬 즐겁고 보람찬 행위라는 것을. 외출이 금지되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옷 쇼핑에 시들해졌다. 화상 카메라 저편으로 외부인을 만나며 정말 보이는 부위에 해당하는 옷만 샀다. 실제로 패션계는 한동안 ‘상의’만 팔리는 판매 그래프를 지켜봐야 했다. 미국 <보그>는 줌 카메라를 잡아당기는 완벽한 블라우스, 편안하면서도 굴곡진 니트, 영화에 나올 법한 볼드한 귀고리를 올해 가장 진솔한 패션으로 꼽았다. 외출복에 대한 쇼핑 욕구는 ‘원 마일 웨어’로 대체됐다. 말 그대로 집 근처 1.6km 반경에서 입을 만한 옷이다. 사회적 합의상 잠옷에 점퍼만 걸치고 갈 수 있는 장소는 편의점까지다. 원 마일 웨어는 대형 마트, 카페, 공유 오피스까지 커버한다. 원 마일 웨어의 정체성은 ‘편하면서도 후줄근해 보이지 않는 옷’이다. 후드 티, 조거 팬츠, 트레이닝 팬츠, 레깅스, 바이커 쇼츠 등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계절이나 TPO에 무관하게 입을 수 있는 ‘기본’ 스타일에 대한 선호도 더 높아졌는데 이는 딱한 경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더불어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SPA 브랜드 옷을 너무 자주 사고 짧게 입었으니까. 사계절이 있는 한반도에서 ‘시즌리스’가 핵심어로 떠오르기도 했다. 트렌치 같은 환절기 아이템을 새로 들이는 대신 보들보들한 플리스를 한 벌 더 사는 편이 현명한 소비였다. ‘편하고 번듯한 아이템’이 패션계를 지배하는 동안 ‘한번 보면 잊을 수 없고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불편한 아이템’은 치욕스러운 수난기를 보내고 있다. 네온 컬러 프릴 원피스, 스터드가 촘촘히 막힌 스틸레토 힐은 지금 이 시간에도 당근마켓에서 새 주인을 기다린다. 오늘도 우리는 포켓이 달린 조거 팬츠와 두툼한 후드 티를 입고 체크무늬 모직 재킷을 걸친 후 폭신한 스니커즈에 발을 밀어 넣는다. 귓가에서 피아노 소품집이 울려 퍼지는 듯한 자유롭고 편안하고 단조로운 룩이다.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자신으로 느끼게 해주는 패션의 힘은 역시 그립다. 비록 그 패션이 비말 차단 마스크와 함께할지라도. —조소현

 

단언컨대 주식과 부동산

2020년 9월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0억원을 돌파했다. 2017년 평균 6억원에서 이번 정부 들어 3년 만에 이렇게 되었다. 세계적 유동자산 증가와 저금리 때문이라기엔 임금 인상률, 물가 상승률과도 괴리된 기형적 수치를 설명할 수 없다. 정부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여러 번 내놨지만 백약이 무효. ‘부동산은 오늘이 가장 싸다’는 학습 효과만 키웠을 뿐이다. 이러니 곧 죽어도 아파트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이나 해서 집값을 따라잡긴커녕 상대적 자산 가치 하락으로 점점 가난해질 뿐이라는 걸, 이제 국민이 안다. 하여 2030마저 ‘영끌 매수’에 나서면서 가계 부채는 선진국 최대 수준이다. 임대인을 보호하려고 2020년 새로 도입된 임대차 3법(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조차 ‘매물 감소-전세난 발생-전세금 폭등-매매가 상승’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현장에서는 ‘문제는 유동성’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정부의 각종 규제는 세수 확보에만 유리하지 실상은 매물을 잠궈 수요자들의 경쟁을 부추긴다는 거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세금보다 투자 수익이 크니 정책을 우습게 보고, 집 한 채 가진 사람들은 공시지가 현실화와 부동산 폭등으로 졸지에 ‘은퇴 후 택스 푸어’가 확정될지언정 집을 팔 수 없다. 하지만 규제를 푸는 건 그것대로 두렵다. 진퇴양난이다. 그나마 올해는 서민들에게 희망이 있었다. 주식이다. 지난 3월 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하자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1990년대 IMF 구제금융 시기, 2001년 뉴욕 9·11 테러,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으로 금융시장의 회복력을 믿게 된 투자자들은 폭락이야말로 기회라 여기고 기다려왔다. 개인 투자자들이 연일 저가에 주식을 사들이며 ‘동학개미운동’이란 표현이 탄생했다. 시장을 지키기 위해 공매도가 일부 제한된 것도 이들에겐 유리했다. 미국으로 몰려간 ‘서학개미’도 있었다. 1월부터 9월까지 국내 투자자가 사들인 테슬라 주식만 2조5,515억원에 달했다. 다행히 코로나19가 비교적 잘 통제되면서 국내 주식시장은 회복했다. 올해 주식을 시작해 상승장만 경험한 일명 ‘주린이’, 특히 10억짜리 서울 아파트는 꿈도 못 꾸게 된 제로 금리 시대 2030에게 주식은 필수 재테크 수단으로 각인되었다. 다양한 섹터에서 세계 최고로 성장 중인 한국 기업, 경기 부양을 위해 각국이 앞다퉈 돈을 풀면서 조성된 사상 유례 없는 유동성 장세, 나만 따라오면 금융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튜버들, 코스피 3,000까지 함께 진격하자는 동학개미들의 결사… 모든 것이 낙관적 전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9월이 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은 연일 기계적으로 우량주를 매도하며 코스피가 ‘박스피’가 된 이유를 신규 개미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정부가 2017년 고지한 대로 내년부터 주식 양도세 과세 기준을 3억까지 내린다고 고집하자 고액 투자자들도 매도에 나서면서 코스피 지수는 긴 조정에 들어갔다. 한 회사 주식을 가족 합산 3억원어치 갖고 있다 팔면 대주주로서 양도세를 내야 한다는 법안은 당초에도 비판이 많았고, 3억원으로는 ‘영끌’을 해도 서울 아파트를 살 수 없게 된 올해는 더 시대착오적으로 들렸다. 결국 ‘3억 대주주 양도세’ 결정은 철회되었다. 그럼 코스피가 다시 달리는 건가? 글쎄, 주식판에서 확실한 것은 ‘확실한 건 없다’는 사실뿐이다. 아, 2020년 확실해진 게 하나 있긴 하다. 투병이 길어지자 생사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슈뢰딩거의 회장님’이라 불리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공식 사망했다. 주식 투자자들은 삼성의 막대한 상속세가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느라 바쁘다. —이숙명(칼럼니스트)

 

1일 3깡의 조롱 혹은 밈

지난여름 비의 ‘깡’ 역주행을 보며 원썬이 떠올랐다. ‘1일 1깡’보다 ‘1일 1원썬’이 먼저 나왔다. 1세대 래퍼 원썬은 2016년 <쇼미더머니 5>에 지원했을 때 “그레이 같은 꼬맹이 빼고는” 심사위원을 다 안다며 자신 있어 했지만 2차 탈락했다. 다음 해 <쇼미더머니 6>에 재지원했으나 예선 탈락했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다던 원썬이 힙한 뮤지션 딘에게 광탈당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조롱하고 즐거워했다. 하루에 세 번은 이 장면을 봐야 한다는 ‘1일 3원썬’이 되면서 원썬은 관련 CF도 찍었지만, 아직도 최고라 자부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요즘 세대의 조롱과 보복에 가깝다. 소셜 미디어를 바탕으로 한 인터넷 문화는 끼리끼리를 부추긴다. 원하는 사람끼리만 소통하고,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은 차단하거나 조롱한다. 조롱은 짧고 강력하고 유머를 내포할수록 강력해진다. 이것이 ‘밈’이라는 문화를 만나 긍정적으로 세탁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TV 프로그램에서 다른 가수들의 무대를 영혼 없는 표정으로(실제로는 아닐 수 있지만) 리액션하는 박미경의 ‘짤’은 인기를 타면서 CF를 찍기도 했다. 비의 깡도 처음엔 조롱이었다. 2000년대 초반의 톱스타였던 비(기성세대)를 두고 지금 세대는 촌스럽다며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웃음으로 승화되며 문화가 되었다. 그 덕에 비의 ‘깡’은 역주행하고 지금 세대에게 오히려 ‘먹히는’ 상황이 되었다. 조롱에서 관심으로, 밈으로, 유행으로 나아가는 이 단계가 신기하다. 하지만 조롱이 아닌 다른 출발의 밈을 보고 싶다. —김나랑

 

K-팝의 진실 혹은 대담

9월 BTS ‘Dynamite’가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랐다. 2주 연속 1위였고 그 후 2주간 2위로 내려갔지만 5주 차에 1위를 탈환했다. 이 성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일단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다. 그전까지는 싸이 ‘강남스타일’이 기록한 2위가 가장 높다. ‘Dynamite’가 핫샷 데뷔를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데뷔와 동시에 1위라는 뜻이다. 당연히 한국 가수로서는 최초이고 미국 가수들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올해 빌보드에서 의미 있는 성과는 BTS뿐은 아니다. 블랙핑크는 ‘How You Like That’으로 핫 100 차트 33위고 ‘Ice Cream’으로는 그보다 높은 13위다. 또 트와이스는 미니 앨범 <More & More>로 빌보드 200 차트에 200위로 진입했고 이달의 소녀는 미니 앨범 <12:00>로 같은 차트 112위다. 올해만큼 한국 그룹이 빌보드 차트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걸 ‘K-팝’의 성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K-팝이라는 프레임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논의를 조금 더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다. 마침 넷플릭스에 공개된 블랙핑크의 다큐멘터리에서 프로듀서 테디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그룹에는 그룹 정체성을 결정짓는 그들만의 문화적 배경이 있어요. 블랙핑크의 특징은 다양한 문화의 결합이에요. 걷고 말하고 입는 방식까지 서로 다른 네 사람이 모였죠. 우리는 그냥 음악을 하려는 한국인이에요. 그런데 한국인이 음악을 만들면 그게 K-팝이라고요? 이해가 안 돼요. 우린 그냥 코리안-팝이에요. 한국어를 쓴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K-팝이란 게 대체 뭘까요?” BTS와 블랙핑크는 과연 얼마나 같을까. 혹시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은 건 아닐까.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비슷한 그룹일까 아닐까. 한국 여성 그룹이니 당연히 묶을 수 있는 걸까. BTS는 K-팝 그룹일까. 블랙핑크는 K-팝에 속할까 속하지 않을까. 한국 그룹은 모두 K-팝 그룹일까. K-팝이라는 단어로 퉁치는 건 이제 좀 게으르다. 디테일에 더 집중할 때다. —김봉현(힙합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