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놀라 홈즈’는 페미니즘, ‘퀸스 갬빗’은?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11.21 12:09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넷플릭스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두 콘텐츠가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드라마 <퀸스 갬빗>과 영화 <에놀라 홈즈>. 두 콘텐츠 모두 한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내용으로, 일각에서는 이른바 ‘페미니즘 콘텐츠’로 여겨지고 있지만, 과연 <퀸스 갬빗>이 페미니즘 콘텐츠인지는 의문이다.
<에놀라 홈즈>는 ‘만약 탐정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에놀라 홈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가정을 바탕으로 쓰인 여성 작가 낸시 스프링거의 소설 『사라진 후작』(2006)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플롯은 단순하다. 어느 날 갑자기 에놀라의 어머니가 사라지고, 에놀라는 각종 ‘성 차별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어머니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여성 참정권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기여한다.
영화의 배경은 소설 『셜록 홈즈』의 배경(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과 동일하다. 이 시기 영국은 세계에서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었다. 영국 여성들은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을 통해 1918년과 1928년 두 차례에 걸쳐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얻어냈다.
영화에서 에놀라 홈즈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서프러제트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갑자기 사라지기 전 그는 에놀라에게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지식들과 전투 기술을 가르친다. 에놀라를 남성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여성으로 홀로 서게 한 것이다(에놀라(Enola)의 철자를 거꾸로 쓰면 ‘alone’(혼자, 단독으로)이다.) 그는 에놀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조를 지켜 에놀라. 남들에게 휘둘리면 안 되지. 특히 남자들한테.” 이 영화는 이렇게 누가 봐도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 <퀸스 갬빗>은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일견 페미니즘 요소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요소는 드물다. 오히려 안티페미니즘(여성주의에 반하는 정치이념)적인 요소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남성 작가 월터 테비스의 동명의 소설(1983)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읜 소녀 베스 하몬이 보육원에서 우연히 접한 체스 게임에서 재능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후 베스는 드라마의 배경인 1960년대 당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체스 게임에서 승승장구하며 결국 세계 최고의 체스 선수가 된다.
이 드라마는 마치 한편의 무협지를 읽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주인공 베스는 체스계의 이른바 ‘먼치킨’(극단적으로 강한 캐릭터)이다.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던 베스가 강한 선수를 맞닥뜨리고 좌절한 후, 수련을 하고 다시 도전해 승리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이 드라마의 중심적인 ‘재미’를 형성한다.
그런데 베스가 홀로 서기 위해서 지나치게 의존적이라는 점은 이러한 재미 요소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먼저, 베스는 체스를 더욱 잘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금지된 약을 먹는다. 약을 먹어야 마음속에 체스판이 떠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약을 먹어 쓰러지지만 복용을 멈추지는 않는다. 베스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 마지막 게임에서야 비로소 약을 끊고 게임에 임한다.
보통의 페미니즘 콘텐츠에서 위기가 닥치면 여성 주인공은 스스로, 혹은 다른 여성의 도움을 받아 그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베스는 체스에서 이기기 위해 오로지 남성들에게 의존한다. 그는 패배할 때마다 남성에게 조언을 구하고, 남성의 가르침 덕분에 실력이 급성장한다. 세계 챔피언과 대결하는 마지막 회에서는 여러 명의 남성이 베스에게 ‘이기는 방법’을 전수한다. 베스는 그 방법을 쪽지에 적어 게임에 임한다.
당시 체스가 남성의 전유물이었기에 베스가 남성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설정일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경기 전날 밤 베스에게 술을 마시자고 졸라서 시합을 망치게 한 것이 여성이라는 점은 생각해봐야 한다. 많은 장면에서 남성은 베스의 조력자 역할을, 여성은 발목을 잡는 역할을 담당한다.
베스가 체스 외에 다른 것에는 젬병이라는 점도 모든 면에서 지혜로운 여성이 등장하는 일반적인 페미니즘 콘텐츠의 특성과 결을 달리한다. 베스는 오로지 체스에만 흥미를 느끼고, 체스에 이기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 외의 다른 모든 면에서는 서툴다. 감독은 시종일관 이런 베스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는데, 소위 ‘백치미’(지능이 낮은 듯하고, 단순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 풍기는 아름다움)를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강한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서 일어나는 카타르시스와 베스의 ‘아름다움’에 취한 시청자는 <퀸스 갬빗>에서 이러한 안티페미니즘적 요소를 보기가 쉽지 않다. 가면 갈수록 여성이 주인공인 콘텐츠가 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다 페미니즘 콘텐츠는 아니다.
김승일 기자 present33@reader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