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플랫폼, 변화하는 창작자①
[쿠키뉴스] 이준범, 이은호, 인세현 기자 = “TV를 보시나요? CD를 들으세요? 극장에는 얼마나 자주 가세요?”
8억8500만 시간. 애플리케이션 분석업체 와이즈앱 집계한 올해 9월 한국인 유튜브 이용 시간이다. 방송국이 아닌 유튜브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고, 극장에서의 단판 승부보다는 넷플릭스에서의 장기 레이스가 치열해진 시대가 왔다. 음악가들은 기획사에 데모 테이프를 보내는 대신 사운드 클라우드에 자작곡을 보내고, TV에 나와 신곡을 홍보하는 대신 틱톡에 ‘챌린지’를 퍼뜨린다.
뉴 미디어의 시대. 밀레니얼 세대의 창작자들은 새로운 흐름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을까. 쿠키뉴스 대중문화팀 기자들이 아이돌 그룹 있지(ITZY)의 ‘낫 샤이’(NOT SHY)를 만든 JYP 퍼블리싱 소속 작곡가 코비,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이신화 작가, 영화 ‘도리화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만든 이종필 감독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 “약해진 방송사 독점 권력, 최적화 플랫폼 고민하는 창작자”
플랫폼의 변화는 이미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대중은 편리하고 새로운 플랫폼에서 다양한 음악, 드라마, 영화를 소비하고 있다. 상영시간표를 보고 극장에 가서 남는 좌석표를 구매하던 관객과 신문의 TV 편성표를 보고 방송 시간을 기다리던 시청자들은 이제 구독형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가입해 업데이트된 영화와 드라마를 원하는 시간에 집에서 감상한다. TV의 음악방송에서 가수들의 무대를 보고 MP3 플레이어로 원하는 음악을 다운받아 정리하던 리스너들은 휴대전화로 유튜브와 큐레이션형 음원 서비스에 접속해 음악을 듣는다.
밀레니얼 창작자들은 이 같은 변화를 긍정적으로 분위기였다. 작곡가 코비는 “유통과 소비 구조가 더욱 넓어지고 다양해지면서 창작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 같아 다행이고 또 기쁘다”이라며 “대중과 창작자가 만나는 플랫폼은 서로의 마음을 충족시켜주고, 동기 부여를 해줘 창작 활성화에 큰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작품을 선보일 채널이 몇 없던 시절보다 자유로워진 측면도 있다. 이신화 작가는 “방송 시스템이 쥐고 있던 독점 권력이 이제는 자기 색이 뚜렷한 창작자들에게 어느 정도 분산되고 있다”며 “하나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그간 수많은 기성 권력에 의한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신선한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의 고민이었다면, 이제는 콘텐츠를 제공할 플랫폼의 다양화와 함께 그런 고민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이 기존 플랫폼을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이라곤 하지만, 배우 이제훈·박정민 주연의 영화 ‘사냥의 시간’(감독 윤성현)이 지난 4월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로 방향을 돌렸다. 개봉을 무기한 연기했던 박신혜·전종서 주연의 영화 ‘콜’(감독 이충현)도 오는 27일 넷플릭스에서 독점 공개를 확정했고, 송중기·김태리의 ‘승리호’도 넷플릭스 공개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필 감독은 “영화 창작자로서 필름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급변할 때와 같은 기분을 느낀다”라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고 했다.
새 플랫폼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건 주목할 만하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콘텐츠보다 나만 아는 콘텐츠를 찾아서 소비하는 대중이 늘면서 기존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흐름이다. 올해 제62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을 비롯해 5개 부문 주요 상을 휩쓴 가수 빌리 아일리시는 4년 전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데뷔 싱글 ‘오션 아이즈(Ocean Eyes)’가 인기를 얻으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작곡가 코비는 “창작자 또한 대중이기 때문에 유튜브, 사운드 클라우드 등 여러 플랫폼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주로 접하고 있다”며 “자신의 콘텐츠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게 소비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모든 창작자가 같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신화 작가 역시 “획일적으로 감상하던 TV가 제공하던 기존의 콘텐츠보다는 대중적으로 아직 덜 알려진 콘텐츠들을 지인과 공유할 때 혹은 제가 발견할 때 더 반가움을 느끼게 된다”며 “이제는 ‘꼭 이런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보다 ‘어떤 방향이든 그 방향을 확실히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TV에서도 조금은 자리 잡는 것 같다”고 전했다.
□ “SNS에선 관객들의 2차 창작물, 흐름 역행은 쉽지 않아“
창작물을 선보일 창구도 과거에 비해 다양해졌다. 유튜브와 사운드클라우드처럼 대중과 창작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겼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하루에도 수 편의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 작곡가 코비는 이런 과정을 “대중의 취향이 시대의 흐름을 변화 시키는 것”으로 봤다. “콘텐츠 소비 주체가 대중인 만큼, 대중의 취향이 시대의 흐름을 만든다면 이에 맞춰 제작 활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방향”이라는 시선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문화 플랫폼 환경은 창작자의 활동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준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결과물을 선보일 기회를 갖는 동시에 신선한 콘텐츠를 접하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이신화 작가도 짧은 시간에 다양한 내용을 살펴 보며 관심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유튜브 탐방을 즐긴다. 아울러 이신화 작가는 “TV 드라마를 선보이는 것에 몰두해, 아직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내보일 기회를 얻진 못했다”면서도 “기회가 된다면 마음을 조금 더 열어두고 새로운 형식의 플랫폼에 맞는 작업물을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작품의 팬들이 SNS 등에서 적극적으로 감상을 전하는 것 또한 창작자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다. 뉴미디어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장일 뿐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를 직접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이종필 감독은 “SNS에서 관객들이 만드는 2차 창작물을 즐겁게 보고 있다”면서 “제가 연출한 영화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때로는 저또한 궁금했던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거나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을 보며 매번 감탄한다”고 귀띔했다.
플랫폼 구조의 변화는 속도전을 불러오기도 했다. 소비할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가 되며 대중은 더 이상 긴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의 호흡이 빨라지고, 음악은 30초에 모든 것을 쏟아 붙는 추세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런 분위기가 아쉽지는 않을까. 이신화 작가는 “이런 흐름을 역행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영화 ‘보이후드’를 예시로 들며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한 호흡에 감상한 사람들은 그만큼 긴 여운을 갖게 되는 작품이 있다. 너무나 어렵겠지만 그럴 만한 작품은 더 귀하게 인정을 받기 때문에,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무모한 창작자들이 나오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이종필 감독 또한 “속도에 관계 없이 잊혀질 것은 잊혀질 것이고 간직될 것은 간직될 것”이라고 답했다.
작곡가 코비는 대중의 시선과 취향을 기민하게 살피고 창작물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대중의 반응을 통해 떠올리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얻고 나의 창작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더 발전된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bluebell@kukinews.com / 사진=JYP엔터테인먼트, 바람픽쳐스, 롯데엔터테인먼트 / 디자인=정보람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