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문화 플랫폼 미래를 생각하며 /김성환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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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10-28 19:21:45
- | 본지 22면
문화도 플랫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작품을 접하는 통로인 만큼 플랫폼의 가치는 작품 그 자체보다 앞선다. 과거 스크린쿼터를 사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것도 영화의 생존이 배급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스크린의 개수는 무의미해졌다.
경쟁은 극장들끼리가 아니라 극장과 이를 대신할 새로운 플랫폼, 즉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사이에서 벌어진다. 요즘 제작되는 영화는 어떤 극장에 걸릴 것인지가 아니라, 극장으로 갈지, 온라인으로 갈지를 고민한다.
극장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새 플랫폼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플랫폼은 현실과 적실하게 결합할 때만 유효할 뿐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특징을 적절히 활용할 때 플랫폼은 지배력을 발휘한다. 영화가 대중예술의 총아가 된 것은 대규모 상영이라는 유통방식이 시대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트리밍 서비스는 개인화된 소비공간을 파고들어 코로나 시대 가장 유력한 영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새 플랫폼의 기술적 특징은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든다. 예컨대, ‘넷플릭스 오리지널’과 같은 고유 브랜드는 인접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화 소비의 경험을 제공한다.
사실 플랫폼의 미래를 점치기는 어렵다. 플랫폼의 국적 문제는 곁다리 논란일 뿐이다. 이미 안착한 새 플랫폼이 유용한 생산도구가 된 이상 이를 인위적으로 거부하거나 개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질문의 초점은 플랫폼의 방향에 맞춰야 한다. 플랫폼의 혁신성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콘텐츠의 가치에 관한 것 말이다.
유튜브를 보자. 지금 그곳에는 수백만의 ‘채널’과 ‘TV’가 있고, 기존 방송을 능가하는 오리지널 콘텐츠도 많다. 최근 폭발적 조회수를 찍은 ‘가짜 사나이’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이름은 차용했지만, 기획과 구성은 과거의 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등장인물의 화제성과 더불어 공중파에서는 보기 힘든 과감한, 혹은 과격한 시도는 이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그 방향성은 실망스럽다. 첫 번째 시즌은 팬덤이 생길 만큼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번째 시즌은 가학성 논란에서 보듯 자극적인 내용이 먼저 두드러졌다. 기존 방송에서 보던 선정성이 더 독해지고 세졌을 뿐 온라인 콘텐츠만의 장점은 더 보이지 않는다. 그 탓에 플랫폼이 담보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가능성도 약화되었다. 스마트폰으로 본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존 매체와의 차별성은 없어졌으니 ‘가짜 사나이’의 인기는 적어도 플랫폼의 관점에서는 퇴보이다.
비슷한 사례로 웹툰을 들 수 있겠다. 종이 만화를 대신한 웹툰은 역시 컴퓨터라는 기술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래로 내려 읽는 종스크롤 구성과 더불어 음성, 동영상을 삽입하는 기술적 특징이 웹툰에서 효율적으로 구현되었다. 이를 근거로 고유의 상상력이 만들어져 웹툰은 기존 만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 종(種)으로 평가받았다. 여기에는 차별화된 유통 방식도 한몫했다.
그랬던 웹툰이 지금은 어떤가. 최근 웹툰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정체된 것 같다. 정형화된 스토리 패턴들이 공식처럼 활용된 탓에 주인공과 배경이 약간씩만 다를 뿐인 양산형 작품들이 넘친다. 그림의 개성이 한데 녹아든 듯한 작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품의 창의성을 분간하기는 어려워졌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한데, 웹툰만의 성취나 감동은 건져지지 않는다. 만화로서의 본질과 웹이라는 플랫폼의 강점이 융합된 사례가 귀해지면서 웹툰은 영화, 드라마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문화 산업의 일부로 떨어진 듯하다. 그러다 보니 선정성이나 혐오 발언 같은 뻔한 논란만 반복되고 웹툰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논란이 불거지긴 했지만 플랫폼이 주목받는 상황은 기회일지 모르겠다. 플랫폼을 통해 개별 작품의 표현과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생산과 유통 전체를 거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랫폼의 본질을 들여다보면서 문화에서 새로움이란 무엇이며 우리 삶에 부합하는 콘텐츠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할 때이다.
문화연구자
경쟁은 극장들끼리가 아니라 극장과 이를 대신할 새로운 플랫폼, 즉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사이에서 벌어진다. 요즘 제작되는 영화는 어떤 극장에 걸릴 것인지가 아니라, 극장으로 갈지, 온라인으로 갈지를 고민한다.
극장이 망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새 플랫폼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플랫폼은 현실과 적실하게 결합할 때만 유효할 뿐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특징을 적절히 활용할 때 플랫폼은 지배력을 발휘한다. 영화가 대중예술의 총아가 된 것은 대규모 상영이라는 유통방식이 시대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트리밍 서비스는 개인화된 소비공간을 파고들어 코로나 시대 가장 유력한 영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새 플랫폼의 기술적 특징은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든다. 예컨대, ‘넷플릭스 오리지널’과 같은 고유 브랜드는 인접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화 소비의 경험을 제공한다.
사실 플랫폼의 미래를 점치기는 어렵다. 플랫폼의 국적 문제는 곁다리 논란일 뿐이다. 이미 안착한 새 플랫폼이 유용한 생산도구가 된 이상 이를 인위적으로 거부하거나 개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질문의 초점은 플랫폼의 방향에 맞춰야 한다. 플랫폼의 혁신성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콘텐츠의 가치에 관한 것 말이다.
유튜브를 보자. 지금 그곳에는 수백만의 ‘채널’과 ‘TV’가 있고, 기존 방송을 능가하는 오리지널 콘텐츠도 많다. 최근 폭발적 조회수를 찍은 ‘가짜 사나이’ 시리즈도 그중 하나다. 이름은 차용했지만, 기획과 구성은 과거의 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등장인물의 화제성과 더불어 공중파에서는 보기 힘든 과감한, 혹은 과격한 시도는 이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그 방향성은 실망스럽다. 첫 번째 시즌은 팬덤이 생길 만큼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번째 시즌은 가학성 논란에서 보듯 자극적인 내용이 먼저 두드러졌다. 기존 방송에서 보던 선정성이 더 독해지고 세졌을 뿐 온라인 콘텐츠만의 장점은 더 보이지 않는다. 그 탓에 플랫폼이 담보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가능성도 약화되었다. 스마트폰으로 본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존 매체와의 차별성은 없어졌으니 ‘가짜 사나이’의 인기는 적어도 플랫폼의 관점에서는 퇴보이다.
비슷한 사례로 웹툰을 들 수 있겠다. 종이 만화를 대신한 웹툰은 역시 컴퓨터라는 기술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래로 내려 읽는 종스크롤 구성과 더불어 음성, 동영상을 삽입하는 기술적 특징이 웹툰에서 효율적으로 구현되었다. 이를 근거로 고유의 상상력이 만들어져 웹툰은 기존 만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 종(種)으로 평가받았다. 여기에는 차별화된 유통 방식도 한몫했다.
그랬던 웹툰이 지금은 어떤가. 최근 웹툰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정체된 것 같다. 정형화된 스토리 패턴들이 공식처럼 활용된 탓에 주인공과 배경이 약간씩만 다를 뿐인 양산형 작품들이 넘친다. 그림의 개성이 한데 녹아든 듯한 작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품의 창의성을 분간하기는 어려워졌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한데, 웹툰만의 성취나 감동은 건져지지 않는다. 만화로서의 본질과 웹이라는 플랫폼의 강점이 융합된 사례가 귀해지면서 웹툰은 영화, 드라마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문화 산업의 일부로 떨어진 듯하다. 그러다 보니 선정성이나 혐오 발언 같은 뻔한 논란만 반복되고 웹툰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논란이 불거지긴 했지만 플랫폼이 주목받는 상황은 기회일지 모르겠다. 플랫폼을 통해 개별 작품의 표현과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생산과 유통 전체를 거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랫폼의 본질을 들여다보면서 문화에서 새로움이란 무엇이며 우리 삶에 부합하는 콘텐츠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할 때이다.
문화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