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여성들 더 독해지고 더 강해지다
보조 역할이던 과거와 달리
주도적이고 섬뜩한 모습 보여줘
여성 영화인력 증가가 원동력
출품작 늘고 다양성 높아져
지난달 개봉한 영화 `디바`.
댄버스 부인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와 멘덜리 저택 관리인 프랭크를 노려보곤 일갈한다.
"어리석기는!" "여자는 즐기면서 살면 안 되는 거야? 나의 레베카는 마음껏 즐기는 삶을 살았어!"
지난 2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영화 `레베카`의 한 장면이다. 조연임에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그를 사람들은 실질적 주연으로 꼽는다. 말미에는 그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는 충격적 결말이 이어진다.
스크린 속 여성들이 더욱 독해지고 더욱 강해졌다. 순종적이고 착하며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던 이전과는 상전벽해다. 남성을 압도하는 무력과 지력을 가진 건 물론이요, 때로는 잔혹한 일조차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극을 내내 주도하며 색다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지난 22일 개봉한 영화 `태양의 소녀들`에선 여성들이 총을 든다.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에 의해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이라크 야지디족 여성들로 이뤄진 전투 부대 `걸스 오브 더 선` 대원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누구 못지않게 엄호·사주경계 등을 능숙히 하며 용감하게 적에 맞선다. 리더 격인 바하르(골시프테 파라하니)가 전투에 앞서 대원들을 격려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우리 여성 목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우린 이미 최악을 겪었는데 그보다 나쁜 게 또 있겠나? 그들이 죽인 건 우리의 두려움뿐이다. (중략) 여성과 생명 자유를 위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래치드`.
지난달 개봉한 스릴러 `디바`에선 주인공 `이영`(신민아)의 광기에 찬 모습이 압권이다. 그간 `로맨틱 코미디 퀸`으로 불려왔던 신민아는 전혀 다른 얼굴로 관객 앞에 나선다. 영화는 절친한 사이인 두 다이빙 선수들 얘기다. 국가대표 다이빙 선수 이영은 동료 수진(이유영)과 같이 있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수진만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영은 너무나 혼란스러운데, 최고의 선수가 돼야 한다는 부담감도 그를 옥죄어 온다. 결국 이영은 미쳐가고, 마지막에 가선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흐흐흐흐…" 하고 흐느낀다. 역시 9월 공개돼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래치드`도 섬뜩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1940년대 미국, 간호사 밀드러드 래치드(사라 폴슨)는 유명 병원 루시아 정신병원에 잠입해 간호사로 취업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랐던 당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는 병원이었다. 래치드는 병원 사람들에게 교묘히 접근해 그들을 조종한다. 그의 영향력은 병원뿐 아니라 병원 밖으로도 뻗어 나간다. 켄 키지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모티프로 만들었다.
이런 캐릭터 흐름은 방송가로도 이어진다. 이달 5일 첫 방송을 시작한 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MBN 드라마 `나의 위험한 아내` 주인공 심재경(김정은)도 잔혹한 동시에 매혹적이다. 재경은 내연녀와 작당해 자신을 죽이려 는 남편의 계획을 역이용해 오히려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스토리가 전개되며 대립은 더욱 격화된다. 작품 내용이 여러 나라 사람들 흥미를 끌며 세계로도 진출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진에 따르면 아시아 13개국을 비롯해 북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인도, 중동에 이르는 5개 권역 사업자들과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현지 OTT 플랫폼 등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이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감독·스태프 등 영화계 내 여성 인력 증가가 주요하게 꼽힌다. 이 덕분에 여성 서사 영화가 양적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더 다채로워졌다는 분석이다.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파문으로 촉발된 2017년 미투 운동 이후 전 세계 영화계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여성을 적극 배려하고 여성 인력 채용도 늘렸다.
미투 운동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여성 제작진의 활동 폭이 넓어졌다. 영화 `디바`의 경우 주연 배우들뿐 아니라 조슬예 감독, 김선령 촬영감독, 제작자인 김윤미 영화사 올 대표 등 주요 제작진이 모두 여성이다. 이 밖에 최근 개봉했거나 개봉 예정인 영화 중 `내가 죽던 날` `소리도 없이` `젊은이의 양지` `애비규환` 등이 여성 감독들 작품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여성들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양하게 변주된 캐릭터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스릴러·범죄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서정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