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넷플릭스와 재택 매뉴얼
박순찬 기자
입력 2020.09.19 03:00
요즘 대형 서점에선 ‘규칙 없음’이 불티나게 팔린다. 극단적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 넷플릭스의 사내 문화를 다룬 책이다. 넷플릭스는 DVD 대여업으로 시작해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회사가 됐는데, 그 성공의 밑바탕엔 연간 휴가 일수 제한도 없고 출장·경비 승인은 물론 어떤 의사 결정도 허락받을 필요 없는 ‘무(無)규칙’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책을 쓴 리드 헤이스팅스 CEO(최고경영자)는 “상사 비위 맞추지 말고 각자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게 행동하면 된다”고 한다. 철저한 자율이다.
이런 파격이 가능한 건 ‘적당히 성과 내는 직원은 두둑한 퇴직금 주고 곧바로 자른다’는 서릿발 같은 해고 권한 때문이다. 계속 직원을 솎아내며 ‘탁월한 인재’만 남기고 그들에게 ‘업계 최고 대우’를 해주며 인재 밀도를 높인다는 전략이다. 철저한 자율, 그에 따르는 혹독한 책임이 넷플릭스의 성장 비결이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확산하자, 최근 고용노동부는 202장짜리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을 내놨다. ‘집에서 일하다 효율이 오르지 않아 카페 가서 일하면 복무 위반 소지가 있다’ ‘재택근무 중 자택 방문자 확인, 우는 아이 달래기, 집 전화 받기, 혹서기 샤워 정도는 회사가 양해해야 한다’ 등 세세한 지침이 담겨 있다. 심지어 ‘상사의 회의 진행 시나리오’부터 ‘팀별 일일·주간 업무 프로세스’까지 그려져 있다. 기업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에 정부가 이런 지침까지 만들어준다는 발상이 놀랍다. 매뉴얼 곳곳에 기업은 여전히 이끌고 지도해야 할 대상이란 시각이 엿보인다. 코로나가 확산한 이후, 정부가 개인과 기업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재택근무는 기업 구성원 간 철저한 신뢰와 자율, 책임 위에서 돌아간다. 정부가 일률적 규칙을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어서도 안 된다. 업종별, 기업별로 각자 특징에 맞춰 최고 효율을 내는 법을 찾을 일이다. 넷플릭스의 ‘무규칙’ 역시 수많은 실험 끝에 정립된 것이다. 그럴듯해 보여도 다른 기업이 그대로 따라 했다간 쫄딱 망하기 십상이다. 한국은 고용 경직성마저 높다. ‘집은 되고 카페는 안 되고’ ‘우는 아이 달래는 건 되고, 게임 하는 건 안 되고’ 식의 정부의 어설픈 훈수는 기업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옭아맬 수 있다.
정부는 선의(善意)로 그랬을지 모른다. 코로나 이후 모든 걸 새롭게 정의하는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기준), 갑작스러운 재택근무에 혼란스러워하는 기업이나 직원도 있을 것이다. 그 해답은 기업 스스로 찾아야지, 정부가 먼저 나설 일은 아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다. 정부가 선의로 추진한 일들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지난 3년간 많이 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