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만으론 한계…K 드라마 ‘이야기’가 필요해
등록 2023-05-15 16:36
남지은 기자
“세계관이 참신하다”, “세계관만 참신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가 지난 12일 공개되자 쏟아져 나온 한 글자만 다른 ‘호평’과 ‘혹평’이다. 사막화된 한국에서 산소와 생필품을 배달하는 택배기사라는 설정이 참신하다는 데 견해가 일치한 것이다. 재난드라마는 많았지만, 먼지에 뒤덮인 일상을 특수효과로 묘사하고, 택배기사라는 직업을 새롭게 해석한 시도는 지금껏 없었다. 주민들은 코어·특별·일반 지역으로 구분되고, 난민이 등장하는 등 계급화된 사회도 투영했다. 그러나 <택배기사>는 원작 웹툰에서 가져온 세계관이 전부다. 참신한 설정은 서사와 개연성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평가다. <택배기사>는 한국 드라마에 또다시 고민거리를 안겼다.
한국 드라마에 불충분한 서사가 용인되기 시작한 것은 오티티가 본격적으로 자체 제작물을 만들면서다. 업계에서는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때부터라고 본다. 욕망의 잔여물이 젤리로 표현되는 독특한 설정이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15년 나온 소설을 6부작 50분물 안에 담다 보니 각 인물의 전사와 관계의 개연성은 부족했다. 한 지상파 출신 드라마 피디는 “당시에는 드라마 회차나 문법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던 초창기였고, 그 기준에선 참신한 면이 있었기에 ‘상황도 서사’라는 말이 용납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다르다. 좀비, 괴생명체, 공상과학 등이 더는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6부작, 8부작 등 다양한 형태도 이미 자리 잡았다. 2021년 <오징어 게임> 성공 이후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 <욘더> 등 그동안 제작비 등 여러 이유로 시도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오티티에서 줄줄이 나오고 있지만 오티티 초창기처럼 시도 자체로 시선을 끌려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종이의 집>은 제작비 400억원을 들였지만 남북한 설정을 가져온 시도가 시행착오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케이블채널 <이엔에이>(ENA)에서 방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밀렸다. 티빙은 연상호 감독이 제작하고 극본을 쓰거나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작품을 잇달아 선보였는데, 2022년 <괴이>는 개연성 부족 등으로 혹평을 받았다.
제작비 250억원을 들여 후반작업에 1년을 들여 특수효과를 강조한 <택배기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택배기사>는 영화 <마스터>를 연출한 조의석 감독이 7년 만에 들고온, 첫 드라마 연출작이다. 미니시리즈 등을 집필한 한 드라마 작가는 “<택배기사>를 보면서 ‘돌연변이’ 설정과 악역 류석(송승헌)의 사연 등 그냥 넘어간 것들이 무수하게 눈에 띄는데, 그런 점이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오티티 작품 제작 경험이 있는 한 영화관계자는 “초창기 작품 선정에 신중하던 오티티들은 <오징어 게임> 이후 시놉시스가 몰려들면서 양적으로 쏟아내기 바빴고, 영화 산업이 저물면서 영화에만 출연하던 배우와 감독들이 앞다퉈 시리즈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영화가 감독의 영역이라면 드라마는 작가의 분야인데, 서로 다른 장르가 오티티에서 아직 절충안을 못찾고 있는 것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작가들은 개연성 하나에 목숨을 건다. 총 16부라면 한 회차 안에서도 기승전결이 이뤄지는 등 구성이 복잡하다. 드라마는 일상에서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몰입과 이완의 적절한 균형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이야기를 넣어온 영화감독들은 드라마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 지금껏 선보인 작품 대다수가 영화 2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준익 감독의 <욘더>가 대표적이고, <택배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카지노>(디즈니플러스) <몸값>(티빙) 정도가 회차별로 구성을 달리하며 드라마 문법에 맞추려 노력한 게 보인다. 정 평론가는 “<택배기사>는 잘 만들어놓은 세계관이 너무 짧은 6부작 틀에 맞춰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다. 드라마라기보다는 6부작으로 나뉜 278분짜리 영화에 가깝다. 군더더기 없고 속도감 있는 연출의 장점으로 볼 수 있지만, 보다 느린 호흡으로 캐릭터들이 가진 저마다의 서사와 감정들을 하나하나 채워 넣고 쌓아서 엔딩으로 끌고 가는 드라마로서는 아쉬운 지점”이라고 말했다.
시즌제 드라마가 덜 정착된 한국 영상 제작 상황을 반영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의 경우 영화 <세븐> <파이트 클럽> 을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넷플릭스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 <마인드 헌터>를 성공시켰고, <아이언맨>의 존 파브로 감독은 북미시장에서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만달로리안>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세심한 심리 표현과 인물의 서사, 개연성 등 한국 드라마의 강점이 약화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정덕현 평론가는 “드라마와 영화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공존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업계에 대한 존중과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드라마가 지닌 가치와 위상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간의 업계가 해왔던 노력을 존중하는 전제 없이는 케이(K)-콘텐츠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918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