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마녀'는 어떻게 생겨났나
▲ 영화 <레커닝> 포스터 넷플릭스 영화 <레커닝> 포스터 ⓒ 넷플릭스
'레커닝'(reckoning)은 계산, 벌, 응징이란 의미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다. 국내 누적 관객수가 겨우 2백 명 정도(2021.09.18,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불과하다. 마녀사냥이란 뻔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인지 공포 영화치고 소름끼치는 긴장감이나 간담 서늘한 느낌, 감동은 별로라는 평이 많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고 마녀사냥을 다룬 거라고 해서 보았다.
소감은? 그런대로 볼만하였다. 시나리오 구성은 꽤 괜찮은 편이다. 특히 제목처럼 그레이스(샬롯 커크 역)가 그를 마녀로 만들던 판사를 응징하는 장면은 통쾌하였다. 마녀로 몰린 숱한 여성 중에 이처럼 응징을 가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마 손으로 꼽을 정도일 거다. 그러기에 영화 레커닝의 사례는 흥미롭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그레어스와 그의 친구 케이트는 대역병 시대 악마짓을 해대는 자들에게 무조건 당하지만 않고 적극 저항한다.
영화 배경은 이른바 '런던 대역병'이 번지던 1665년경 중세 잉글랜드의 한적한 마을이다. 시내에는 시신이 나뒹굴고 개들과 쥐떼가 들끓는다. 이런 생지옥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은 사랑하고 시기하고 살고자 음모를 꾸며 다른 사람을 희생양을 삼는다. 실제런던 대역병 당시 런던에서만 전체 46만 인구 중에 약 7만 5천 명이 사망(16.3%)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전대미문의 역병이 나돌면 민심은 흉흉해지고 온갖 유언비어와 희생양 찾기가 유행하게 마련이다. 지금이야 방송통신과 의료 기술 발전으로 백신을 개발하고 가짜뉴스를 바로 잡을 수단이라도 있지만, 그런 게 너무 부족했던 중세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거 같다. 영화 레커닝은 흑사병이 무섭게 번지는 가운데 그걸 교묘히 악용해 재산을 불리고 무고히 사람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그레이스는 남편 조셉(조 앤더슨 역)을 흑사병으로 잃은 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친다. 딱히 벌이도 없이 여성 홀로 아기를 기르며 산다는 건 당시로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집주인 스콰이어 페들턴(스티븐 워딩 턴 역)은 밀린 월세를 내라 압박하며 자신과 같이 살자고 하지만 그레이스는 끝내 거절한다. 사랑하는 남편 조셉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주인 페들턴은 그레이스를 겁탈하려다 그레이스의 목숨을 건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일로 체면을 구기자 마을 사람들에게 음모론을 제기한다. 남편을 흑사병으로 잃은 여자가 아기와 함께 살아남은 건 뭔가 수상하다는 것.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가뜩이나 희생양 찾기에 골몰하던 주민들은 대번 그 여인을 '마녀'로 단정한다. 반론이나 합리적 토론을 제기할 수 없는 상태는 집단 광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임이 틀림없다.
▲ 고문당하는 그레이스 영화 <레커닝>의 주인공 그레이스가 마녀임을 실토하라고 강요당하며 고문을 당하는 중이다 ⓒ 넷플릭스
집주인은 악명 높은 마녀 사냥꾼 무어 크래프트 판사(숀 퍼트위 역)까지 불러다 그레이스를 재판에 회부한다. 판사는 그레이스에게 온갖 고문을 가하여 마녀임을 실토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실토하든 안 하든 '마녀'라는 누명을 벗거나 살아남기는 힘들다. 이는 군부독재 시절 간첩 조작하는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마녀는 그렇게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잔인한 고문은 마녀 퇴치라는 종교적 신성한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지하 감옥에 갇히 그레이스는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환상에 시달린다. 악마는 사랑하는 남편 조셉으로 둔갑해 다가와 때론 성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레이스를 실제 마녀로 만들고자 갖은 유혹을 한다. 물론 이는 그레이스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투에 해당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연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무서운 정신력을 발휘해 마녀임을 끝내 실토하지 않는다. 되레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마녀로 만들어 죽이는 자들에게 응징을 가한다.
▲ 영화 <레커닝> 한 장면 주인공 그레이스의 모친이 마녀로 몰려 죽는 장면 ⓒ 넷플릭스
영화는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으로 '50만 명'의 여성이 죽었다고 알려 준다. 무지몽매한 자들이 상상한 '마녀'라는 존재가 너무도 터무니 없는 여성혐오와 학살극을 낳은 것이다. 우린 중세 마녀사냥의 광기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오늘날 또 다른 형태의 마녀사냥은 없는 걸까?
중세 마녀사냥 때 마녀로 몰려 죽은 사람은 비단 주술 혐의를 받은 여성들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아이, 노인들까지도 마녀로 몰려 죽었다고 한다. 이는 마녀사냥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무분별하게 행해졌는지를 알려준다. 영화 레커닝은 그중 한 사례를 피해만이 아닌 응징이란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