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대사에 웬 자막? “대사 정확하게 전달돼” 관객들 호평 쏟아졌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전투장면 일부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해
함선 격파 등 소리 제대로 살려 사운드-대사 전달 ‘두 토끼 잡기’
일부선 “되레 몰입 깨져” 지적도
개봉 닷새째인 지난달 31일까지 관객 227만 명을 모으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한산: 용의 출현’(한산)에는 압도적인 해상 전투 장면 외에도 눈길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다. 해전이 본격화되는 영화 후반부, 조선 수군이 대사를 할 때 한글 자막이 나온 것. 이순신 장군 역의 배우 박해일이 “준비시켜 놓은 나머지 배들도 내보내거라”라고 말할 때 이 대사가 스크린 하단에 자막으로 뜨는 식이다.
한국어 대사를 한글 자막으로 처리한 전례 없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은 대체로 호평을 쏟아냈다. 영화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김한민 감독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자막 덕에 대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센스 있고 영리한 선택이다”, “그간 한국 영화를 볼 때 잘 안 들리는 대사에 집중하느라 중요한 장면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그럴 일이 없어 좋았다”는 의견이 다수다.
김 감독은 지난달 인터뷰에서 “전쟁의 밀도감을 높이려면 사운드의 힘이 필요한데, 대사를 잘 전달하려면 이 사운드를 눌러버려야 했다”며 “무슨 말인지 안 들린다는 원망도 듣기 싫었고, 전쟁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민 끝에 자막을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운드가 큰) 전쟁 장면에서 시도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는 것. 실제 그의 전작 ‘명량’(2014년) 개봉 당시에도 전투 사운드 때문에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를 자막으로 보완하고 대사 외의 사운드를 살리는 데 집중한 덕에 화포 및 조총 발사 소리, 함선 격파 소리를 최대한으로 담아낸 ‘한산’의 해상전투 장면이 어느 영화보다 생생하고 웅장하다는 평가가 많다.
자막 활용은 ‘한산’이 여름 극장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로도 꼽힌다. 최근 개봉한 ‘헤어질 결심’ ‘브로커’ ‘외계+인’ 등 한국영화 대작을 두고 관객들 사이에서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지적이 종종 나왔기 때문. 명확한 대사에 대한 갈증이 고조된 시점에 일부 장면에서나마 자막을 단 한국 영화가 나온 셈이다. 일부 관객들은 “‘한산’처럼 다른 한국 영화도 자막을 넣어주면 좋겠다”거나 해외 애니메이션을 더빙판, 자막판으로 분리 편성하듯이 한국 영화도 자막판을 따로 편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건 김 감독 말대로 ‘선택의 딜레마’ 탓도 있다. 한 영화 제작사 대표는 “사운드 믹싱을 할 때 대사를 더 명확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효과음 등 나머지 사운드가 약해져 영화의 분위기가 죽는다”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화 창작자들은 대사냐 사운드냐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를 겪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팬데믹 기간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이용이 확산된 영향도 있다. 넷플릭스 등은 자국 콘텐츠에도 자국어 자막을 넣어 감상할 수 있게 해 많은 관객들이 여기에 익숙해져버린 것. 일각에선 “OTT의 자막 서비스가 모국어 듣기 능력을 퇴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영화 속 자막을 비판하는 의견도 없진 않다. ‘한산’의 자막에 대한 호평이 대다수인 가운데 “자막 때문에 몰입이 깨졌다”, “한국 영화에 한글 자막이 왜 필요하냐”는 의견도 나온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자막은 편리하지만 외국 영화를 볼 때 자막을 읽느라 미장센 등 영화 자체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 감상에 있어 양날의 검”이라며 “‘한산’처럼 불가피한 경우에 한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면 자막 활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